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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면장군(黑面將軍)이 나타났다 -태백의 사배(四拜)리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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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등록일
2025-11-03
조회수
8

명운아, 많이 추우냐?

네, 스님. 손이 다 오그라들고 발은 얼음인지 고드랫돌인지 모르겠습니다. 

도승이 묻는 말에 뒤따라오던 여덟 살의 동자승 명운이 그렇게 대답했다. 문곡에서 떠나올 때 외눈박이 정씨가 사냥해서 잡았다는 토끼의 털로 만든 귀마개를 명운의 귀에 씌워주었는데, 녀석은 그게 좋아 잠시도 벗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귀는 안 시릴 것 같았다. 토끼털 귀마개를 쓴 녀석이 귀여웠다.   

고드랫돌도 아느냐?

예, 며칠 전 문곡의 사 씨 집에 들렀을 때 짚으로 자리를 짜지 않았습니까. 그때 주먹만 한 돌의 이름이 뭔가 해서 여쭤봤더니 고드랫돌이라고 했습니다.   음, 눈썰미가 있구나. 스님은 명운에게 미소를 지었다. 일곱 해 전, 영월을 지나오다가 수해로 마을이 다 떠내려가고 사람이 많이 죽었을 때, 물가에서 목숨을 부지한 핏덩이를 스님이 장삼으로 싸서 안고 와 길렀는데, 그 아이가 명운이었다. 엄 씨 집성촌에서 데리고 온 아이라 엄 씨 집안의 손일 게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만 아이의 원래 이름이 뭔지는 몰랐다. 그 핏덩어리가 자라는 게 한양의 북한산에 있는 절에서는 즐거움이었다. 명운이 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이 날 이때까지 무탈하게 잘 자라준 데 대해 스님은 늘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명운아? 

예.

너는 그동안 둘러본 태백의 여러 마을 중 어디가 가장 좋았느냐?

스님, 저는 다 좋았습니다. 산도 좋고 물도 좋고, 풀도 나무도 다 좋았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저를 아버지처럼 늘 챙겨주시니 어디를 가도 다 좋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겨울에 다니는 게 너무 힘듭니다. 이러다가 길에서 얼음이 돼 움직이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음, 그럴 일은 없을 게다. 좀 있다가 토막집이라도 나오면 들러서 불이라도 얻어 쬐고 가자. 주인이 허락하면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겠지? 하고 명운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스님이 생각해봐도 어린 아이가 쉽게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네, 스님

명운의 목소리가 많이 맑아졌다.

눈이 오는 계절을 앞두고 태백으로 온 건 잘한 일이 아니지 싶었다. 거기다 아이까지 대동하고 오니 힘이 부쳤다. 한양에서 절을 떠날 때 갖고 왔던 버선과 짚신은 이미 다 떨어져 길섶에 버린 지 오래였다. 봉화에서 올 때 불심 깊은 노파가 미리 꿰매놓은 버선들을 시주해준 덕에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해까지는 혼자서 전국을 돌며 객승을 했지만 올해는 헛헛한 마음 때문에 동자승 명운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걸음이 느린 아이를 대동하다 보니 지체할 적이 많았다. 스님은 젊을 적부터 한곳에 오래 머물면서 수양을 하는 게 안 맞았다. 암자에 따로 올라가 불도를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속세의 어려움을 모르고 불공을 드리러 온 이들을 위로해 줄 수는 없다는 게 혜음 스님의 뜻이었다. 원효대사가 그랬듯, 혜음 스님도 늘 중생의 곁에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이 부처님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양의 본 사찰에서 만류하는 스님들이 여럿 있었는데도 기어코 명운만큼은 아들 삼아 데리고 나왔고 줄곧 사계절을 함께하는 중이었다. 

어린 명운을 데리고 한양을 떠난 게 정월 대보름을 지났을 땐데, 벌써 동짓달로 접어드니까 그동안 1년 가까운 세월을 길에서 보낸 것이었다. 물론 스님의 전체 인생으로 봤을 땐 40년 가까운 세월을 길에서 보냈다. 스물다섯 이후 객승이 되었으니까. 올봄부터 여름까지 스님은 어린 명운과 경기도와 충청도를 돌았고, 가을에는 경상북도 상주와 영주, 봉화를 둘러봤다. 태백에 도착한 것은 서리가 내릴 무렵이었다. 스님은 올해 초 길을 떠날 때만 해도 태백산에 일찍 도착해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봄에는 한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막상 태백에 와보니 한양에는 더 늦어서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겨울에 태백에 온 건 스님의 실수 같았지만, 그래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 위에서 태백산과 그 산에 붙어있는 작은 산들 이야기를 많이 해줘서 그런지, 명운은 기억하고 있는 것도 많았고 물어보는 것도 많았다. 스님의 어렸을 때랑 비슷해서 스님은 되도 않는 질문에 웃을 때도 많았다. 어렸을 때 노스님은, 넌 무슨 궁금한 게 그리 많으냐, 고 야단도 많이 쳤다. 이렇게 산길을 걸을 때 스님은 길섶의 풀과 꽃의 이름, 곤충과 새의 이름을 일일이 물어보았다. 그러다 자라서는 관심사가 달라졌다. 파계를 하고 싶은 충동을 일게 하는 여인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한때뿐, 스님은 부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스님은 길 위에서 별의별 이야기를 다 접했고 숱한 인생들을 만났다. 절에 있으면 속세가 너무도 궁금해 수양에 방해가 되었지만, 오히려 세상으로 들어가면 절이 그리워지고 산속이 그리워졌다. 인생이라는 것이 태어나서 자라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아이 낳고 살다가 병들고 늙어 죽는 일로 요약해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 인생살이에 뭐 특별한 게 있나 하고 기웃대다가 때가 되면 다 북망산천으로 향했다. 

조선 땅 어디를 지나가도 어떤 모양의 동네라 할지라도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저마다 숱한 사연이 있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엔 오욕칠정을 다스리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았기에 한양 도성에도, 지방의 소읍과 그에 달린 작은 산골짜기 마을에도 평안한 곳이 없었다. 나라님이 힘을 못 쓰고, 간신들이 왕의 자리에 앉다시피 해서 백성의 고혈을 짜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엄청난 세금을 내도 또 세금이 부과가 됐다. 태어난 지 달포도 안 된 아이에게도, 이제 곧 북망산천으로 갈 노인에게도 부역을 나오라고 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몰래 도망을 쳐서 관군의 발길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서 유리걸식을 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며 살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살기도 했다. 그들은 산 아래에서 온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을 잡으러 온 자인 줄 알고 겁에 질려 도망을 가거나 독을 품고 달려들기도 했다. 

스님은 오래도록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보니 풍수지리에도 능했다. 산세와 지세가 보이고 걸출한 인물이 나오는 명당이 보였다. 사주와 궁합, 관상, 택일에 이르기까지 도통한 게 많아서 도사님으로 불릴 때가 많았다. 사실 스님은 이번에 태백으로 오면서 뭔가 특별한 이상異象을 볼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명운에게 대답해 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태백산으로 향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닌 것도 아니었다. 노쇠한 몸으로 태백산을 다녀가는 게 스님의 생에서 마지막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가 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스님은 이번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면 이 세상의 모든 업보를 내려놓고 연꽃의 나라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동안에 마지막으로 태백을 한 번 더 다녀갈 수 있게 된 것이 스님한테는 더없는 축복이었다. 젊은 날 풍찬노숙風餐露宿도 마다하고, 중국을 거쳐 인도로 가서 부처의 뜻을 찾겠다는 큰 꿈이 있었지만 그러지는 못했고, 대신 전국을 돌아보는 것으로 우회해 지금껏 살아왔다. 그걸 다 이루었으니 아쉬울 것 없는 생이었다. 

어쩌면 이곳 태백산 기슭 외딴 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그렇게 됐을 때 나무를 주워 모으고 불을 지펴 육신을 다 태워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동자승 명운을 데리고 온 건 아닌지, 스님도 본심을 잘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 세상을 등질 경우 스님의 대를 잇는 새로운 후계자를 태백으로 데리고 왔으니 이 땅에 대한 예의는 나름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치고 지나갔다. 명운에게 나중에 죽으면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할까 싶었지만, 태백산에서 죽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숨이 더 붙어 몇 년을 더 살 수도 있는 일이라 그런 이야기는 아예 안 꺼냈다. 열여덟의 어느 날, 스님은 스승으로 모시는 노스님이 암자에서 입적했을 때, 산길 삼십 리를 달려가 다비식을 치를 다른 스님들을 데리고 오는 대신 혼자서 평평한 곳에 노스님을 끌고 가 나무 위에 눕히고 불을 지펴서 뼈마디만 수습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잠깐 어디 앉아 쉬자꾸나. 

스님의 말에 명운이 저기 좋은 곳이 있습니다, 하고 바위로 달려갔다. 

스님은 다리도 불편하고 배도 고파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간혹 마을을 만나끼니를 때울 때가 있었지만 골짜기 골짜기마다 사는 형편이 여의치 못해 물만 얻어 마시고 와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산등성이에서 골짜기로, 골짜기에서 다시 산등성이로 움직이면서 만나게 되는 마을들. 그 마을들을 지나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까 싶은 곳에도 사람은 마을을 이루거나 아니면 외딴 섬처럼 살고 있었다. 골짜기 양지바른 데다 대충 기둥을 세우고 벽을 바르고 문을 걸면 집이었다. 토막집도 자주 눈에 띄었다. 산 속에 들어온 이들은 야트막한 산 하나쯤은 쉽게 생각해 홀랑 불을 놓아 밭을 만들고 거기다 씨앗을 뿌렸다. 태백산과 그 산의 지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화전밭이나 비탈진 좁다란 밭에다가 조, 콩, 메밀, 감자, 옥수수 따위를 심어먹었다. 그런 것들이라도 넉넉히 거두지는 못했다. 산속에 들어가 약초를 캐든 도토리라도 주워모아야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묵을 때면 마음이 편칠 않았다. 그들은 없는 살림에도, 하루나 이틀 묵고 떠나는 스님과 명운을 위해 가는 길에 먹으라고 볶은 콩이나 옥수수를 스님의 바랑에 넣어주었다. 그 덕으로 스님과 명운은 일찍 겨울이 온 태백의 골짜기에서 객사를 하지 않았다. 스님은, 척박한 곳에 살면서도 인정을 버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 감읍하면서 복을 빌어주었다.  

스님, 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태백산이 나오는 겁니까, 그리고 민가가 나오는 거 맞습니까? 그러면 거기 가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겁니까? 스님, 저는 조밥에 짠지를 먹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조밥에 짠지라? 이 스님은, 동치미 국물에 메밀묵을 말아먹으면 소원이 없겠구나. 

스님은 눈발이 날리는 하늘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동치미에 메밀묵을 말아먹는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돌았다. 이 산골 마을에 어느 팔자 편한 집이 있어 그런 것을 얻어먹을 수 있을까. 스님은 명운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속 얘기를 드러내고 만 것 같아 머쓱해졌다. 스님은 계속해서 실언을 하는 것은, 그제부터 변변히 뭘 못 먹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사는 데 식량이야 없겠느냐. 가서 요기를 할 수 있을 테지. 눈이 이제 막 시작된 걸 보니 곧 태백 전체가 눈에 푹 빠질 텐데, 그렇게 되면 태백산은 봄이 되어야 올라갈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때까지는 태백산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돌아보자꾸나. 우선은 바삐 걸어 저녁 무렵 장성에 도착하면 네 소원은 이루어질 것 같구나.  

스님은 동자승에게 힘을 북돋워주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올해 같은 심한 가뭄과 역병이 든 해에, 이쪽 산속 마을도 온전히 버티고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호환虎患은 피해갔는지 그것도 심히 걱정이 됐다. 

버덩이든 산속이든 조선 땅엔 언제나 태평성대가 올는지. 스님은 새로운 임금이 나타나서 태평성대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런 적은 없었다. 살아있는 동안 임금이 바뀌기를 여러 번 했지만 한 번도 더 나아진 세상은 만나보지 못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미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 소리를 들은 명운이 앵무새처럼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을 따라했다. 맑고 새된 목소리였다. 아직 사내인지 계집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세상에 있으면 부모 밑에서 코흘리개로 떼나 쓸 나이에 고행이었다. 

저 철부지를 데리고 태백산을 올라갔다 내려올 수는 있을는지. 가까워 보여도 태백산 천제단까지 가려면 까마득했다. 태백산 큰 줄기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자잘한 산과 산이 골짜기를 만들고, 벌판을 만들었다. 그 벌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었다. 우선은 그리운 이들이 있는 장성을 들렀다가 날씨가 허락하면 태백산 천제단까지 올라갔다 올 생각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벌써 눈발이 흩날리다 눈으로 바뀌어 길바닥에 눈이 쌓이는 것을 보니, 계획은 어그러질 것 같았다.   

태백산은 스님에게 고향 같은 곳, 아니 실제로 고향이었다. 스님의 태를 묻은 곳이라고 했으니 고향이 맞았다. 스님은 자신을 길러준 노스님한테, 자신을 태백산이 가까운 어떤 마을에서 발견해 데려다 길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가 죽고 의지가지 할 데 없는 스님을 노스님이 데리고 한양까지 가서 길러준 거였다. 그게 스님의 다섯 살 적 얘기였다. 스님은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태백이란 땅을 다시 밟았다. 그때 왔다가 장명사라는 절도 처음 알게 됐다. 이후 객승이 돼서 태백산엘 올라가거나 내려올 때, 꼭 들르는 절이 장명사였다. 스님에게 있어 장명사는 고향 같은 절이었다.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어찌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몰랐다. 앞에 큰 개울이 있어서도 아니고, 뒤에 수려한 바위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며칠만 머물러 있어도 바람하고도 교류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극락이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산이라고 생명 있는 것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히나 스님은 태백산과 그 이웃한 산에 깃들어 있는 숱한 생명들을 사랑했다. 연화산, 함백산, 대덕산, 대조봉, 만항재 어디 하나 안 예쁜 산이 있을까. 꽃밭등 같은 예쁜 이름의 산등성이가 태백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산에는 나무도 많았고 꽃도 많았다. 거기에 깃들어 사는 동물들은 얼마나 많았나. 산에 올라가거나 내려올 때 길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만났던가. 고라니가 나타나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산비탈로 뛰어올라가기도 하고, 멧돼지가 예닐곱 마리 새끼를 데리고 숲을 지나가기도 했다. 다람쥐가 바위 위에서 도토리나 밤을 물고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토끼가 굴을 찾아 뛰어 들어가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스님은 그 생명들이 오래오래 목숨을 부지하면서 끊임없이 생명을 틔워내길 축수했다. 그 아이들이 호랑이의 밥이 안 되길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생명들이 아니면 사람이 호랑이의 밥이 되어야 했다. 


명운과 나란히 넓적한 바위에 앉아 쉬는 동안에도 눈은 계속 쏟아졌다. 그때 골짜기 건너편 참나무 밑에 새로 쌓았는지 이끼도 안 낀 호박돌들이 수북하게 쌓인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엎어놓은 잿빛 시루도, 가락꼬지도 보였다. 최근에 누가 호랑이한테 또 먹혔구나. 가슴이 저려왔다.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비타불관세음보살. 명운이 스님이 보고 있던 호식총을 보면서 스님, 저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스님은 어린 명운에게 호식총을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래서 네 눈엔 저게 뭐로 보이냐, 고 물었다.  

저건, 돌탑 아닙니까?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서, 쌓아놓은 돌무더기 아닙니까?

맞는 것 같으나 틀렸구나. 

스님은 호식총을 돌탑으로 보는 어린애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대답을 해주었다. 

호식총이란다. 

호식총이라구요? 그게 뭡니까?

스님은, 호랑이가 사람을 끌고 가 몸통은 다 먹고 큰 다리뼈나 머리만 놔두는데, 그걸 화장한 뒤 그 위에 돌을 쌓고 시루를 뒤집어 얹어놓는 게 호식총이다, 하고 알려주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걸 이른 나이에 깨우치는 것이 아이의 심성을 파괴하는 것은 아닐까 해서. 지금 어린애한테 말해 줘야 깊은 산 속에서 겁만 집어먹고 걸음도 더 굼떠질 것 같아서였다.  

나중에 더 자라면 알게 될 게다.

무엇인데요, 스님? 스님은 꼭 물어보시고 답은 안 주시는 고약한 취미가 있으십니다.

스님도 동자승 시절에 노스님께서 장난을 치고 답을 안 해줘 야속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가 엊그제 같았다. 십년, 이십 년, 삼십 년, 그렇게 세월이 가고 또 그만큼의 세월이 가고, 이제 그 노승과 똑같은 모습으로 어린 명운에게 농을 걸고 있는 것을 깨닫고 웃었다. 함박꽃 같은 굵은 눈송이들이 말할 때마다 입으로 눈으로 떨어졌다. 스님의 하얀 수염에도, 명운의 발갛게 언 손 위에도. 

도대체 그 사이 누가 호환(虎患)을 당했을까. 예전부터 쭉 들를 때마다 옥수수쌀이라고 미안해하면서 시주를 해주던 아낙일까, 아니면 합죽이 입으로 물이라도 드시라고 하면서 물을 한 바가지 퍼오던 방 씨의 어머니일까. 버덩에서 못 살고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온 데는 저마다 사연이 있을 터인데, 여기에서도 제 명을 다 못 누리고 호랑이밥이 되다니. 가정맹어호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진짜 호랑이한테 목숨을 잃으니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 없었다. 스님은 당장이라도 그 호랑이를 찾아내 죽여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스님은 계속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렸다. 문곡 쪽에서는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를 못 들었으니까 장성 쪽 사람이 산을 넘다 당했거나, 아니면 호랑이가 그쪽으로 가서 사람을 낚아채다 이곳까지 끌고 와서 먹었든지 둘 중 하나였다.  


스님은 예전에 태백산을 다녀갈 때도 이곳저곳에서 수없이 많은 호식총을 만났다. 

어느 골짜기에는 아홉 개의 호식총이 있었다. 그 호식총들 앞에서, 사람과 호랑이의업에 대해 깊은 번민에 휩싸이게 됐다.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을 수십 번 되뇌며 망자의 영혼을 위로했지만, 다음해 또 한두 개의 시루가 또 돌무더기 위에 올라앉았다. 

화전민이 사는 동네에서는 심심찮게 누가 호랑이한테 물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골 저 골 지나다 보면, 호랑이한테 물려가 머리만 댕강 남은 남편을, 아내를 화장해 묻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서 정신이 반은 나간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한양도성에서도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했다. 하물며 첩첩산중에 호랑이가 출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호랑이는 제 사는 영역을 침범하고 들어온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해 그렇게 무지막지한 입을 벌려 사람의 살을 바수어 뜯어먹는지도 몰랐다. 지금보다 기운이 팔팔할 때도 스님은 산길을 걷다 호랑이의 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린 적도 많았다. 태백산은 그런 데였다.  

일흔이 되어가는 이때까지 사람들의 생로병사를 곁에서 지켜보니 인간사가 다 부질없었다. 산 속 날짐승과 길짐승도 인간처럼 태어나서 자라고 시집장가가고 늙고 병들어 죽었다. 다만 초목이 짐승과 다른 것은 죽은 것 같다가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지금 막 내리는 눈이 쌓이고 겨울 내내 또 눈이 와서 그 위에 쌓여도 봄이 되면 모두 녹을 것이다. 엄청나게 내려 쌓이고 쌓인 태백산의 눈들은 녹아서 물이 되고, 그 물은 계곡과 내를 이루어 물가에 사는 풀에게 힘을 주고 버들치와 열목어의 살을 올리게 하겠지. 가재의 앞다리를 힘차게 만드는 것도 그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의 힘이겠지. 눈과 얼음은 녹으면서 못과 개울의 잠자는 개구리를 깨우고 땅속에 뿌리를 내린 식물들에게 힘을 주어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게 하겠지. 내가 극락으로 가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세상은 돌아가겠지.  

눈이 오는 하늘도 어둠침침한데 산 속이라 금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걸음은 점점 더뎌지고 눈은 점점 하얗게 쌓여갔다. 나뭇가지를 건드릴 때마다 눈이 툭툭 떨어졌다. 종아리까지 눈이 푹푹 빠졌다. 거지가 빨래하는 날이구나. 스님은 아까보다 걸음이 굼떠진 명운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뜻이에요, 스님? 명운이 짧은 가랑이를 벌려 스님이 밟아 내놓은 발자국에 발을 들이밀면서 관심을 보여 왔다. 눈이 오는 날은 안 오는 날보다 바람도 덜 불고 훨씬 푸근해서 그 기회를 봐 거지가 빨래를 한다는 뜻이다. 아, 그렇지만, 스님 저는 발이 너무 시립니다. 명운이 우는 소리를 했다. 스님도 버선을 신고 있긴 했지만, 이미 버선은 눈이 녹아 축축한데 거기다가 계속 눈 속을 헤치고 오다 보니 발이 시렸다. 아까 목에 감고 있던 광목 목도리를 꺼내 반으로 갈라 양쪽 발을 감싸고 있는데도 발이 시려 오그라드는 것은 스님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푹푹 빠지는 비탈길로 해서 고개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깐 올라온 비탈을 뒤돌아보니 문곡 쪽이 천지분간 못하게 하얗게 바뀌었다. 스님이 기억하기에 조금만 더 걸으면 물박달나무 숲이 나올 것이고, 그 뒤로 한참 더 넘어가면 인가가 나타났다. 발이 시리긴 해도 곧 연기가 오르는 토막집 안으로 들어가면 뜨끈한 구들에서 언 몸을 녹일 수 있을 것이었다. 불을 쬘 것을 생각하니 몸이 덜 떨리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한편으로는, 호랑이가 툭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아름드리 노송과 물박달나무가 꽉 들어찬 숲에서는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 아름드리 뒤라면 호랑이 한 마리는 충분히 몸을 숨기고 사냥감을 기다릴 수 있을 테니까.  

이제 고개까지 오르면 문곡이 뒤가 되고 장성이 앞이 되는 거였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 쓴 물박달나무 숲이 나타났다. 스님은 거스러미처럼 들고 일어난, 헌데 자국 같기도 하고, 누룽지를 긁어놓은 것 같기도 한 나무의 껍질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명운에게 다 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간 애썼다며 안심을 시켰다. 그러면서 스님 본인은 안심이 안 됐다. 반짝거리게 밀어 머리카락이라곤 하나도 없는 머리였지만 자꾸 쭈뼛쭈뼛해졌으니까. 숱한 골짜기를 지나고 숱한 산등성이를 넘었지만, 이번처럼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노승들에겐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고 했다. 스님도 나라에 큰 불행이 있거나, 스님이 몸담고 있는 절 근처 마을에 안 좋을 일이 일어날 때는 늘 머리가 아프거나 쭈뼛쭈뼛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물박달나무 숲을 다 빠져나왔더니 눈은 많이 그쳐 있었고, 어둠 속에서도 눈이 그치고 난 세상은 온통 하얬다. 솔안松內 평지가 보였다. 소란뜰, 소란평지라고 해서 왜 이런 이름이 붙었나 했더니 소나무가 울창한 숲이 있다고 그렇게 불리는 곳이었다. 산 속 치고는 꽤 너른 들이었다. 그 들의 끝으로 이어지는 자잘한 산들은 요동을 치면서 다른 산자락과 산등성이로 연결되면서 태백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님은 숨도 고를 겸 잠시 멈춰 서서 지세를 살펴보았다. 예전에도 오르내리긴 했지만 겨울의 이 고개를 넘는 건 처음이었고, 대놓고 지세를 살펴보려는 마음이 든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불빛이 반짝이는 어느 집에 눈길을 주다 거두어 산세며 마을의 모양새를 살피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뻣뻣해지면서 눈앞에 한 번도 못 봤던 광경이 펼쳐졌다. 

기골이 장대한 시커먼 장군이 저 먼 산 쪽에서 솟아나더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장군의 온몸은 숯덩이처럼 까맸다. 투구도 까맸고 얼굴도 까맸다. 

창검도 까맸다. 눈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투구의 외눈에서는 황금빛 불빛이 쏟아졌다. 밤에 본 호랑이의 눈에서 나오는 불빛이라고 해야 할까. 그 장군의 뒤로 똑같은 형체의 수천, 수만의 군사들이 떼로 몰려왔다. 온 땅을 다 덮고도 남을 엄청난 무리의 군대. 그들의 투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에 스님은 온몸이 마비가 되는 것 같았다. 스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색이 됐다. 내가 뭔 잘못을 해서 이런 게 보이나. 옆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낀 명운이 겁을 내면서 스님을 부축하려고 했다. 스님, 괜찮으십니까? 머리가 많이 아프십니까? 

아니다, 괜찮다, 걱정 말아라. 잠시 후, 스님은 몸의 중심을 잡고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눈밭에서 연거푸 절을 네 번 했다. 스님의 두 손과 머리가 향한 곳은 장성 쪽이었다. 명운은 절을 한 번 하는 것, 두 번 하는 것, 세 번 하는 것, 네 번 하는 것의 차이를 스님한테 배운 적이 있었다. 네 번 절을 하는 임금한테 예를 올릴 때, 공자님한테 예를 갖출 때라고 했다. 그렇다면 스님은 임금님을 보았다는 것인가. 명운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스님 어찌하여 절을 그것도 네 번이나 하십니까?” 

“여기 지세(地勢)를 가만히 보니 몇 백 년 뒤에는 흑면장군(黑面將軍)이 수만 명이나 나올 터구나. 그들의 형상이 순간 너무 두려워서 절을 하는 것이니 어서 너도 절을 해라.“ 

명운은 방금 전 스님처럼 허공을 향해 네 번 연거푸 절을 했다. 눈밭에서 절을 하다 보니, 손이 더 시렸지만 손이 시리다고 엄살을 부리진 않았다.  

잠시 후 스님은 방금 전 혹시 뭔가를 잘못 봤나, 하는 생각에 눈을 비비고 발밑으로 펼쳐진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검은 형상의 장군, 장군의 뒤를 가득 메우고 있는 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깜빡거리는 몇 개의 불빛이 보였다. 인가의 불빛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그것이 참 애매하구나. 스님은 입으로 중얼거렸다. 곧 동지가 다가오니 밤이 길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불빛이 깜빡이는 그 집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고개 아래로 내려가면서 스님은 말이 없는데 명운은 흑면장군은 언제 오고, 어떻게 올 것인지를 자꾸 캐물었다. 스님도 일흔을 바라보는 이날 이때껏 처음 보는 형상이었던지라 어떻게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명운은, 스님이 보신 게 도깨비가 아니냐고, 귀신이 아니냐고 물었다. 스님은 오늘 내게 들은 것은 함부로 말하지 말아라, 알겠느냐, 하고 명운에게 주의를 주었다. 지리산에 속한 마을들을 돌아다닐 때 아기장수 우투리 전설을 들은 게 기억났다. 장차 힘든 백성을 구하기 위해 아기장수가 나와 군사훈련을 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아직 힘도 없는 아기장수를 잔인하게 죽여서 백성들의 꿈을 짓밟아버렸다. 혹시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해서 명운의 입단속을 시켰다. 


그날 스님은 명운과 마을로 내려가 저녁밥을 얻어먹었다. 스님은 방 씨네 집에서 방 씨의 노모가 차려준 저녁을 먹었다. 노모는 갑작스러운 방문인데도 몸을 꿈지럭거려서 상을 차려냈다. 방 씨의 노모는 옥수수밥에 고춧가루가 아예 안 들어간 짠지를 내왔다. 그 밤, 호환으로 아내를 잃은 박 첨지가 스님을 보러 왔다. 스님은 박 첨지를 위로해 주고, 큰 화를 당했으니 이젠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문제로 마음이 지옥에 있으면 안 된다고 당부를 했다. 그러면서도 그게 맞는 답 같지는 않았다. 스님의 방문만으로도 위로를 받은 것 같다고, 박 첨지는 수십 번도 넘게 감사를 표했다. 스님은 밤새도록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명운은 자다깨다를 반복하다가 새벽부터 내린 눈이 가슴패기까지 쌓였을 때 느직하게 일어났다. 명운의 일생에서 가장 많이 눈이 쌓인 날이라서 평생 잊지 못했다.  


세월은 바람개비처럼 빠르게 돌면서 소년을 할아버지로 만들고, 소녀를 할머니로 만들었다. 그 어린 동자승 명운도 장성해서 객승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고 어느새 노승이 됐다. 명운 스님은 혜음 스님 못지않게 불자들뿐만 아니라 스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그런 스님이었다. 명운 스님은 노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그래왔듯, 산과 물을 귀히 여기고 생명이 있는 것들을 귀히 여겼다. 노스님이 그랬듯이 태백산에 다녀가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명운 스님은 영월과 정선을 지나서 태백엘 올 때도 있었고, 봉화로 해서 태백을 올 때도 있었다. 가끔은 동해안으로 해서 삼척을 지나 통리를 거쳐서 올 적도 있었다. 명운 스님은 자신이 영월의 어느 어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스님이 입적하기 바로 전에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이후 명운 스님은 영월을, 그리고 아버지 같았던 혜음 스님의 고향인 태백을 애틋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운 스님은 혜음 스님처럼 생명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자했다. 살아있는 부처님 소리를 들으면서 스님은 그 옛날 혜음 스님이 걸어왔던 길을 걸어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갔다. 명운 스님은 태백의 곳곳에서 혜음 스님을 느꼈다. 어쩌면 혜음 스님보다 더 태백을 사랑하는지 몰랐다. 노스님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이유 때문에 그랬을까. 태백의 산골짜기들이 마치 어머니처럼 다가왔다. 

명운 스님은 특히나 꽃을 좋아해서 꽃피는 봄날 올 때는 꽃구경을 온 건지, 중생들을 돌보러 온 건지 헷갈릴 때도 많았다. 특히 꽃밭등이라고 부르는,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산등성이를 올려다 볼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봄에는 꽃 덕분에 눈이 즐겁고, 여름에는 계곡 물 덕분에 몸이 시원했다. 가을에는 태백산의 맑은 정기 덕분에 수양이 잘 됐고, 겨울엔 손이 덜 바쁘다 보니 중생들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나누게 됐다. 겨울에 들른 산골짜기 사람들은, 덫을 놓아 잡은 산토끼 고기를 대접하려고 했지만 살생은 철저히 금했기에 그런 대접만은 피했다. 

명운 스님은 태백의 한 귀퉁이라도 밟지 않으면 그 해를 잘못 보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 년에 한 번은 꼭 그 땅을 밟아야 마음이 덜 허전했다. 방문하는 계절은 해마다 달라졌지만 태백에서 보내는 그 계절은 최고로 빛났다. 그렇게 살아오는 사이 수십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갔다. 임금이 여러 번 바뀌었다. 조선은 왕자가 점점 귀해지고 외척의 득세는 날로 심해졌다. 그럴수록 이 태백산을 근거로 살아가는 이들의 처지는 더 팍팍해졌다. 명운 스님이 나타나면 태백의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이 반가워하고 스님의 염불과 이야기에 힘을 냈다. 

명운 스님도 태백에 왔을 때 빼놓지 않은 절이 있었다. 장명사라는 절에 다녀가는 것은 명운 스님에겐 큰 기쁨이었다. 명운 스님은 문곡의 고개를 넘어 장성 땅으로 들어설 때마다 노스님이 보고 놀라서 절을 한 그 흑면장군이 떠올랐다. 어떤 형상인지를 그려봤지만 직접 본 게 아니었기 때문에 잘 그려지지는 않았다. 흑면장군이 어째서 장성 쪽에 나타나려고 하는지 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억겁의 시간도 아니고 몇 백 년 후에 온다니 기다리지 못할 것은 없지만 조바심치게 그 시간은 길어 보였다. 흑면장군은 이 나라를 도탄에서 구해줄 사람인지 아닌지 그것도 잘 알 수 없었다. 혜음 스님의 말로 그려본 형상만으로도 오싹할 때도 있었지만, 그들이 칼과 창을 휘두르면서 쫓아온 게 아닌 걸 보면 나쁜 군대는 아닐 것 같았다. 자신이 열반에 들기 전까지 흑면장군이 나타나지 않을 것은 분명했는데, 그건 명운 스님 스스로 생각해 봐도 아쉬운 일이었다. 

죽기 마지막으로 명운 스님이 장명사라는 절에 왔다가 가는 길이었다. 스님은 장성 땅에 흑면장군이 나타날 거라는 노스님의 환상을 마치 자신이 본 듯 그 날의 정황이 떠올랐다. 물론 한양에 있을 때도 그 이야기는 한 번도 머릿속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 마지막이 되는 길에서, 역적으로 몰려 도망을 와서 화전을 일구고 이름까지 바꾸고 살고 있는 조 씨네 집에 묵을 때였다. 이 땅에 무슨 희망이라도 있겠느냐고,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하다는 말을 하는 그 사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혹 위로가 될까 싶어 고민하다가 스님은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지금부터 거의 육십 년이 다 돼가는 아주 오래 전 얘기요, 로 시작된 명운 스님의 이야기를, 조 씨 집에 스님의 설법을 들으려고 모였던 이들이, 두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스님은 마치 자신이 본 것처럼 그날의 노스님이 본 환상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노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눈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이 땅에서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말씀이지요? 세상에, 흑면장군이 오시다니. 그 얘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흥분을 하고, 마치 내일이라도 장군이 나타날 것처럼 반색을 했다. 그러고는 일제히 고개 쪽을 향해 절을 네 번했다. 그들이 너무도 밝아진 모습에, 스님은 떠벌리고 다녀서 화를 자초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마음속에만 품고 떠벌리지 말라고 거듭해서 당부를 했다. 

스님이 다녀간 후 마을 사람들은 고개 이름을 사배재라고 부르고 마을 이름도 사배리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고 할아버지가 되어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할머니가 손녀한테, 손녀가 다시 할머니가 되어 손자손녀들에게 전해주는 사이에 몇 백 년이 지나갔다. 그들은 이야기를 아끼고 아끼다가 해주면서 마지막에는 떠벌리지 말고 품고 있으라는 이야기를 했다. 


노승의 법명인 혜음도, 동자승이었다가 노승이 된 명운 스님의 이름도 더 이상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날이 왔다. 그저 옛날에, 아주 오랜 옛날에 살았던 도승과 동자승으로 기억될 뿐이었고, 얼굴을 말한다 해도 두 스님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살아남지 않았다. 혜음과 명운 스님이 그 옛날 이곳을 거쳐 갔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알려줘도 시큰둥했다. 그저 그렇고 그런 옛날이야기거니 했다. 뭐가 아쉬워 숯 검댕 칠을 하고 장군 놀이를 하겠냐고 비꼬던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보다 많은 시대가 돼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손자손녀들이 이야기를 해달라 하면 옛날에 들었던 가락으로 흑면장군 이야기를 해줬다. 이야기 끝에는 이 말을 누구에게도 함부로 발설치 말라고 했다. 

마음속에만 품고 있으라고 했다. 마음속에만 품으라고 했지만, 다들 그 근질거리는 이야기를 품고만 있으려 하지 않고 어린애들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사배리골 사람들은 그 땅을 찾아 흑면장군이 속히 나타나길 손꼽아 기다렸다. 오래고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당장 한두 해 뒤가 아니고, 십년 이십 년 뒤도 아니고 백년, 이백 년 넘게 시간이 흐른 후에야 흑면장군 수만 명이 나타난다는 말에 실망을 하면서도 어쩌면 당장이라도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물박달나무 숲까지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마을에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실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흑면장군과 그 군대의 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그 마음 하나만은 같았다. 흑면장군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졌고 자긍심이 생겼다. 흑면장군은 이렇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흑면장군과 그 부대를 떠올리면서 힘을 얻었다. 사람들은 마을이 흑면장군의 도우심으로 언젠가 살기 좋아질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외척들이 득세하면서 나라가 점점 기울어지더니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임금이 되었다. 태백 쪽에서도 경복궁 중건을 위해 헌물을 하고 나무를 보냈다. 잠깐 희망을 가져봤지만 이쪽까지 뭔 특별히 좋은 일은 없었다. 영월이나 정선에 다녀온 어른들이 침통한 이야기를 했다. 아주 먼 곳에서 배를 타고 온 이들이 나라를 빼앗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고 했다. 나라가 풍전등화야. 그 말이 돌고  얼마 못 가 왜인들 세상이 됐다. 순사를 대동하고 온 왜인들이 마을의 형세를 살피면서 지하에 뭔가가 많이 묻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 이름을 조사하고 나무 이름을 조사하고, 그동안 관심도 안 갖던 이것저것에 대한 조사를 다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가득 안고 만세운동을 불렀지만 왜인들의 총칼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흑면장군님이 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서 왜놈들을 물리쳐 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어렸을 적 옛날이야기로 흑면장군 이야기를 들었던 노인들은 왜정 때 순사들을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왜인들 앞에서도 그랬지만 다른 동네 사람들한테도 굳이 흑면장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 말이 혹시나 왜인들한테 들어가면 뭔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인들은 인물 나오지 못하게 명산의 혈에 쇠못을 박는다고 했으니까. 옛날에도 조사를 했는데, 왜인들 조사원은 또 마을을 방문해서 동네의 어른들을 붙잡고 마을 이름이 왜 사배재고, 왜 사배리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른들은, 산세가 너무도 아름다워 도승이 네 번 절 한 게 고개이름이 되고 마을이름이 됐다고 둘러댔다. 그 말을 들은 왜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넉 四 자에, 절 拜 자를 쓰고는 마을 이름조사를 마쳤다. 일본은 바로 행정구역명칭을 사배리로 해놓고, 고개이름을 사배재로 정해놓았다. 

그런데 얼마 후 왜인들이 또 나타나서는 태백의 산 속에 석탄이라는 게 많이 매장돼 있다면서 본격적으로 조사했다. 왜인들은 산의 높이를 재고, 땅 속에 침을 꽂아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조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그저 땅 속에는 거대한 바위가 들어있는 줄만 알았지 탄이라는 게 들어있을 줄은 몰랐다. 가끔 조무래기들이 바위에서 버짐처럼 갈라져 떨어진 돌조각을 주워와 자랑을 한 적이 종종 있었다. 물고기나 벌레 같은 무늬가 찍힌 돌은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그러나 태백의 땅 속에 그렇게 많은 석탄이 들어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못했다. 왜인들은 그 탄을 잘 가공해서 연료로 사용하면 나무를 때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왜인들은 조선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서 탄을 마구 캐서 경성으로 부산으로 실어냈다. 그걸 실어내기 위해 태백 곳곳에 역을 만들고 기차를 오가게 했다. 석탄을 캐기 위해 마을 사람들도 동원했다. 석탄 캐는 것은 고된 노동이었는데 그들이 주는 알량한 돈으로는 양식을 사먹기도 힘들었다. 갱도가 무너져 애먼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때가 많았다. 

왜인들이 물러가고 나서도 탄은 계속 캐냈지만 한국동란 중에는 광산도 쉬었다. 

마을에 몇 안 남은 어른들 중 몇이 한국동란 중에 국군의 모습에서 흑면장군을 찾으려했지만, 역시 형체가 까맣지 않았기 때문에 괜한 일이라고 했다. 마을엔 있던 집들도 떠나고 쑥밭이 돼갔다. 3년 뒤 전쟁이 끝난 후에 탄을 캐는 일이 쭉 이어졌다. 동란 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킬 힘도 없는 그때에 태백산 지하 깊숙이 묻힌 탄은, 서울로 실려가 나무 구하기 힘든 서울 사람들에게 중요한 땔감이 된다고 했다. 장성 땅에서는 여전히 나무를 분질러 불을 때서 밥을 해먹고 소죽을 끓여주고 있었지만, 서울을 비롯한 큰 도시에서는 더 이상 나무와 장작에 의존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는 점점 그 세도를 확대해나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집집마다 아이를 많이 낳다 보니, 식구가 늘어나고 식구가 늘어나니 방은 더 필요해졌다. 좁은 땅덩어리에 여러 집이 살아야 하니, 위로위로 치쌓아서 집을 짓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반주택이든 아파트든 점점 더 하늘에 맞닿을 듯이 올라갔다. 이제 석탄을 캐지 않으면 도시의 수많은 집들이 밥을 해먹고 난방을 할 수가 없게 됐다. 석탄의 인기는 점점 치솟았다. 여기저기서 탄광이 개발되었고, 태백의 탄광은 그 어느 데보다 인기가 높았다. 석탄 캐는 일을 하러 전국에서 사내들이 몰려왔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못 구한 중년부터 청년까지, 숱한 사내들의 일터로 장성은 인기가 높아졌다.  

관사들이 세워지고 시장이 들어섰다. 사내들의 식솔들이 살러 오니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들어섰다. 장성은 이제 더 이상 그 옛날 화전민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시가지가 점점 더 커지더니 삼척 땅에서 분리되어 태백시로 승격이 됐다. 


여기가 장성이요. 내리시오. 버스기사의 말에 한 사내가 쭈뼛쭈뼛 내렸다. 이제 마흔을 코앞에 둔 사내였다. 사내는, 피난 갔던 아버지가 서울에 눌러 살게 되면서 태백으로 못 돌아오고 줄곧 서울에서 줄곧 살아왔다. 서울이 점점 커지고 있긴 했지만, 쥐꼬리만한 월급 갖고는 네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거기에다가 노부모 부양까지 해야 했다. 탄광으로 가면 먹고 사는 일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아주 어렸을 때 떠나면서 금의환향을 꿈꾸었는데, 그렇지 못해 마음이 편칠 않았다. 

그래서 더 그랬을까. 어른이 돼서 처음으로 돌아오는 고향이 낯설기만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불을 때서 감자를 몇 알 넣고 지어준 옥수수밥, 조밥을 먹고 자란 고향. 사내는 그 좁은 골짜기가 이렇게 남자들로 북적북적한 동네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화전(火田) 부쳐 먹던 사람들이 세 들어 살던 산골 마을이 광산촌으로 바뀌다니. 사내가 기억해도 마을이라고 하기엔 애매할 정도로 집도 몇 채 안 되던 고향이었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흥성거리는 곳으로 변할 줄은 몰랐다. 감개가 무량했다. 호랑이가 물어갈 놈이라는 욕을 먹으면서 자란 이곳에 더 이상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수천수만의 광부(鑛夫)들이 사는 동네로 바뀌었다고 했다. 탄광(炭鑛)은 마을의 분위기도 싹 바꾸어 놓았다.


사내는 심호흡을 했다. 광부가 되려고 광업소를 찾아온 길이었지만, 어떻게 자신을 소개하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 몰라 난감했다. 이제 곧 사무소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탄 좀 캘 수 있는지 물어보고 자리를 달라고 부탁할 예정이었다. 

사내가 우선 며칠 묵을 생각을 하고 옷가지 몇 개를 집어넣고 꾸린 인조가죽가방을 어깨에 메고 장성광업소 앞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탄 캐는 작업을 마친 광부들이 터널 입구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홍수 날 줄 미리 알고 대피하기 위해 기어 나오는 개미들처럼 그들은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갱도를 빠져나온 남자들은 모두가 까맸다. 얼굴과 손까지 탄이 묻어 까맣게 되니까 영락없는 흑인병사였다. 작업복도 곡괭이도 갱도를 나온 것들은 모두 까맸다. 

아, 흑면장군이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었다. 옛날 얘기를 조르면 어른들은,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이렇게 운을 떼고 호랑이 이야기며 구렁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때 꼭 빠뜨리지 않고 해주던 이야기가 흑면장군(黑面將軍) 이야기였다. 옛날이야기 속의 흑면장군들이 지금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앙상해 보였던 이야기에 살이 붙으면서, 마치 방금 전 영화나 만화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내는 도승의 예언 속 흑면장군이 어떻게 광부(鑛夫)의 모습과 맞아떨어지는지 따져보았다. 온몸에 석탄이 묻으니 전체적으로 새카만데다가 얼굴마저 까맣게 되니까 흑면(黑面)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 거기다 광부들이 쓴 안전모(安全帽)는 장군의 투구로 볼 수 있고, 투구에서 나온 불빛은 헤드랜턴의 불이니 그것도 어김없이 딱 맞아떨어졌다. 탄을 캐는 곡괭이며 갱도를 만들 때 쓰는 톱과 도끼는 칼과 창을 연상시켰다. 어디 그뿐인가. 장화 신고 군용 혁대에다 수통(水桶)까지 찼으니 그 모습을 장군(將軍)이라고 안 할 수 있을까. 혹 누군가가 부정한다 해도 광부(鑛夫)들은 진짜 흑면장군(黑面將軍)이 맞았다. 광부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는 옛날, 도승의 환상 속 장군은 광부였을 것이다. 광부들을 보고 도승이 놀라 절을 했을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미소가 지어졌다. 도승(道僧)의 환상과 예언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저 먼 조상 적부터 내려오던 그 이야기가 드디어 사내가 살아있는 이 시대에 눈앞에 펼쳐졌는데, 어찌 놀라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사내는 오래도록 자리에 붙박여 서서 광부들을, 아니 흑면장군들을 지켜보았다.   


서울에서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장성광업소로 오면서, 내가 이제 막장까지 왔구나, 하고 자괴감에 머리를 앞자리에 찧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도 했다. 

사지로 가는 줄 알고 처와 아들 둘이 몇날 며칠을 시무룩해 있었다.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배웅했다.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심란해 있던 중이었다. 장군들의 모습을 보니, 광부가 되는 일은 곧 장군이 되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드디어 내가 흑면장군이 되는구나. 이제 작업복을 갖춰 입고 지하 깊은 곳을 다녀오면 나 자신도 흑면장군으로 등극하는 것이지. 곧 흑면장군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어려서 저 골짜기에 살 때 친구들과 장군놀이를 할 때 장군이 될 땐 잠시라도 힘이 들어갔지 않은가. 

일이 적응이 되고 오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가족을 불러올 작정이었다. 가족을 데리러 가면, 중학생과 초등학생 아들한테 한 번도 안 해주었던 그 얘기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영화 <요괴인간>을 좋아하는 아들들이 그 얘기를 해주면 좋아하려나. 아내와 노부모가 좀 안심을 하려나. 사내는 태백의 하늘을 쳐다보고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탄가루 때문에 마을의 집들도 길바닥도, 하다못해 냇물까지 새까맸고 공기 속에도 분진이 섞여 있어 탁했는데도 폐 속 깊이 그 공기를 맑다고 생각하면서 들이켰다.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사내가 밟고 있는 그 땅이 공교롭게도 그 옛날 혜음 스님과 동자승 명운이 마을을 떠날 때 밟은 그 길이었다. 

이른 봄, 태백에서 무사히 겨울을 난 혜음 스님은 장명사에 한 번 더 들렀다가 동자승 명운을 데리고 훨씬 가벼워진 걸음으로 그 길을 걸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사내는 혜음 스님처럼 정신을 차리고 수백 명의 광부들 사이를 뚫고 광업소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 이야기는 전 태백문화원장인 김강산 선생의 구술과 그분의 저서 『태백시지명지』를 참고하여 재구성했습니다.


손윤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