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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쉬고 싶을 땐 -우리는 지지리골로 간다(태백 지지리골 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5-11-03
조회수
14
  • 숨을 쉬고 싶을 땐 -우리는 지지리골로 간다(태백 지지리골 이야기) 사진 1

제천, 정선을 지나 버스가 태백에 도착한 건 아침 9시 무렵이었다. 통로 건너편에 앉은 중년 여자가 친언니인지 친한 언니인지하고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는 바람에 몇 번 잠이 들다 깨다를 반복하는 사이에 버스가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거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효준은 바로 튀어나왔다. 11말의 아침 공기는 찼지만 그걸 맡으니 좀 살 것 같았다. 다음부턴 꼭 차를 갖고 와야지. 효준은 야간근무가 막 끝난 새벽에 떠나면서 혹시나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를 낼까봐 차를 안 가지고 오기로 했다. 그래서 버스를 탔는데 오랜만에 타는 버스는 편하지 않았다. 아줌마의 무신경도 짜증이 났지만 버스 안 특유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살짝 아팠다. 밀폐된 공간에서 세 시간 남짓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었다.

효준은 직업상 화재사고 현장이나 위험발생 지역이 근무지였다. 화재신고 출동을 받고 현장에 도착했는데 이미 다 타버린 실내에 들어가서 타다 남은 시체를 들어낼 때가 있었다. 흉측하게 타버린 시체도 끔찍했지만, 그들이 죽기 전 질식해 쓰러져 밖으로 못 나온 채 불길 속에 탈 때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숨을 쉬기 힘들었다. 지옥의 한가운데 들어온 기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화재 신고를 받고 초스피드로 현장에 간다 해도 이미 불은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아무리 장비를 튼튼히 하고 있다고 해도, 유독가스를 안 마실 수가 없었다. 새까만 연기가 치솟고 용암이 흐르는 듯 뜨거운 그 현장은, 생과 사의 경계가 아주 모호했다. 대피와 구조를 잘 마치고 나오면 아,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찾아왔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열패감 때문에 며칠 동안 맥을 못 추었다. 미세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해도 화재현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소는 다 청정지역으로 보였다. 그것에 비하면 버스 안 냄새야 고문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준은 아주 오래전부터 버스 안에서 나는 냄새를 싫어했다. 서울에 살면서 크게 자동차가 필요하지 않았는데도 차를 산 건, 여행을 하든 승연을 보러 태백으로 오든 차가 없으면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때의 냄새를 맡기 싫어서였다. 넌, 어렸을 때부터 버스를 타면 악을 쓰고 울었어.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한 게 기억났다. 

후각이 예민한 효준은 소방공무원으로 앞으로의 무수한 날들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화재 진압을 하고 돌아올 때 그는 콧속을 후비는 게 습관이었다. 그때마다 콧속에서는 새까만 가루가 코와 엉겨서 나왔다. 유독가스를 마시지 않았는데도 콧구멍이 그 모양이었으니, 그걸 마신 이들의 폐가 멀쩡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효준은 냄새에 대한 반응이 격한 것이 호흡기가 썩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어렸을 때 기관지가 좋지 않아 기침을 많이 했고, 자라서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황사가 심할 때는 한 달 넘게 기침을 해댔다. 어머니는 늘 기관지에 좋다는 뭔가를 찾아와서 약을 해주었지만 쉬 나아지지는 않았다. 오빤 좀 예민한 것 같아. 여자 친구 승연은. 방금 전까지도 멀쩡하다가 바람이 좀 세게 분다고 기침을 해대거나, 고기를 굽다 탄내가 좀 심해 기침을 멈추지 못할 때 그 말을 했다. 효준도 그걸 부정하지는 않았다. 기관지에 좋다는 배즙과 도라지즙을 아침저녁으로 마시고 오피스텔에 공기청정기를 들여놓고 지내도 기침은 잘 멎지 않았다. 요 몇 년 동안 미세먼지가 심해지면서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지낼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뭐가 좀 나아졌는지는 아직 잘 몰랐다.  


승연은 어젯밤 마지막으로 통화할 때, 터미널에 도착할 무렵 해서 차 가지고 가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했다. 아침에 버스를 타면서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가만있었더니 태백에 도착하기 십분 전에야 문자가 왔다. 지난밤에, 다운 받은 영화를 보다가 늦게 자서 이제 막 일어났다고. 머리 감고 말리노라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효준은, 어차피 산에 갈 건데, 그냥 모자 하나 눌러쓰고 가면 안 되겠냐고 문자에 답을 보냈다. 승연은, 찜찜한 기분으로 산에 가면 안 가는 것만 못하다고, 씻고 나갈 거라고 답을 보냈다. 승연은 효준에게 터미널 안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알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라고 했다. 효준은 알았다고, 괜찮다고 문자를 보냈다가 생각이 바뀌어서 택시를 타고 황지에 가 있겠다고 했다. 승연은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승연이 사는 전세 아파트가 황지 근처에 있으니까 두 사람 모두에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효준은 황지에 제대로 가 본 적이 없었다. 승연이 태백으로 교사발령을 받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차타고 지나가면서 흘끗 본 게 전부였다. 승연이 그랬다. 저기 보이지? 저 안쪽으로 들어가면 꽤 큰 못이 있어. 연꽃이 자라는 게 아니니까 연못은 아니고, 푸른 물이 올라오는 못. 황지라 해서 처음엔 누르스름한, 황토물이 나오는 덴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가보니까 그렇진 않아. 나중에 시간 날 때 지나가듯이 보면 돼. 전설이 재미있지 실물을 보면 실망하는 법이야. 그날 승연은 조수석에 앉아서, 직구로 구입한 명품백의 몸체에 사방으로 들어간 회사 이니셜을 쓸어보며 그렇게 말했다. 들렀다 가겠다고 하면 승연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 알았다고 하고 황지는 지나쳐 버렸다. 그런 이유로 효준은 태백의 명소 랭킹 5위 안에 드는, 그 유명한 황지를 못 보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승연을 만나러 올 땐 늦은 저녁이나 한밤중일 때였고, 헤어질 때도 밥 먹고 차 마시고 어물어물 하다 보면 황지는 돌려놓고 가게 됐다.   

효준은 자신의 인생 안으로 태백이라는 도시가 이렇게 깊이 들어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대한민국이 작다고는 하지만, 막상 떠나보면 속속들이 이런 데가 다 있나 할 정도로 놀라운 데가 많다는 걸 대학 때 ‘내일로 티켓’을 끊어 기차여행을 하면서 알게 됐다. 서울 사람들 중에는 어떤 구, 어떤 동을 평생 한 번도 안 가보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물며 전국방방곡곡의 도시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효준은 그때 여행을 하면서 이런 도시가 있었네, 이 도시가 이 도시와 붙어 있었네, 하고 많이 놀랐다. 지역 이름이 나오면 대충 전라도거니, 경상도거니, 충청도거니, 강원도거니 하고 어림짐작을 할 뿐이었다. 어물어물하다 보면 전국의 주요명소도 다 못 둘러보고 세상을 마칠 것 같았다. 효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EBS <한국기행>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속속들이 좋은 데가 많은데, 가본 데가 안 가본 데보다 더 적다니까, 하면서 매회 아쉬워했다. 퇴임을 하고부터 부쩍 여행을 많이 하는 부모님이지만, 그렇게 여행을 한다 해도 <한국기행>에 나온 곳들의 십분의 일도 못 가볼 것 같았다. 

태백은 효준의 일생에서 몇 번째로 중요하게 다가온 도시였다. 수원에서 태어나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고, 포천에서 군생활을 했고, 지금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니 삼십 년 세월 동안 경기도 안을 못 벗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인 가평과 어머니의 고향인 홍천은 그에게 고향 같은 공간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여행하면서 한두 번 거쳐 갔기에 잘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지리 좀 아는 도시가 여자 친구 승연을 만나면서 춘천 정도? 그러다가 승연 덕분인지 때문인지 태백이라는 도시가 깊이 침투해 왔다.불경스럽긴 하지만, 그는 태백 하면 이태백이 먼저 떠올랐다. 이십대 태반은 백수라는 말의 줄임말. 그 말이 유행할 때 그는 대학에 막 입학했고, 취업의 문은 너무도 좁아 앞으로 취업은 할 수 있을까 하는 공포심마저 느꼈다. 공기업 취업이 안 되면 공무원이 되리라, 애당초 마음속으로 공무원이 되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태백이라는 곳은 재작년 가을 승연이 교사발령을 받고 나서야 처음으로 밟아보게 됐다. 승연의 이삿짐을 날라주러 태백으로 가기 전, 스마트폰으로 태백을 검색했다. 태백은 강원도 어디쯤에 있나, 그 상하좌우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 지도를 살펴보다가 무안했던 기억이 났다. 생각했던 도시들의 위치와 태백의 위치가 사뭇 달랐다. 그때까지 효준이 알고 있는 태백의 키워드는 황지, 고랭지배추, 탄광, 예수원, 검룡소, 태백산 이 정도였다. 승연 덕분에, 효준은 스물아홉 살이 돼서야 머리에 털 난 다음 처음으로 태백 땅을 밟아봤다.  

이삿짐을 정리한 다음 효준은 백문이불여일견이라면서 승연을 졸라 검룡소에 가봤다. 그날 오후에는 승연과 바람의 언덕에서 대형 바람개비를 보았다. 그리고 작년에 왔을 때 마침 6월이라 금대봉 천상의 화원에 가서 야생화 군락을 만났다. 승연은, 한국에 있는 타샤의 정원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승연은 타샤 튜더를 너무 좋아해, 미국 버몬트주로 타샤의 집을 가보는 게 버킷리스트에 들어있다고 했다. 꽃에 대해선 문외한인 효준이 봐도 금대봉의 꽃들을 수수하면서 예뻤다. 동자꽃 엉겅퀴 금꿩의다리 원추리꽃 하늘말나리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꽃들을 처음 봤는데 예뻤다.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포트메리온 그릇세트의 그림들하고 비슷한 듯 달랐다. 왜 한국에서는 그런 그릇들을 안 만드나 궁금할 정도로 천상의 화원 꽃들은 매혹적이었다. 그다음 번에 왔을 때는 석탄박물관을 가봤는데, 그건 효준이 원해서였다. 효준이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갔는데, 승연은 거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날 효준은 화석을 보느라 넋을 놓았다. 그러고 나서 지난여름이 끝나갈 무렵 고랭지배추밭엘 다녀왔다. 배추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는 그곳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또하나의 정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태백엘 여러 번 오게 되면서 태백의 지도가 웬만큼 그려지고 있었다. 2년 남짓한 동안, 여러 번의 태백행이 이루어지는 중에도 황지는 번번이 빼놓았는데 이번엔 잠시라도 꼭 보고 가고 싶었다. 제주도 가서 한라산을 안 올라갔다 온 것과 같은 기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켕기는 마음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고 싶지 않아 효준은, 승연이 늦게 일어나 준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승연은 왜 내게 켕기는 마음을 허락한 걸까. 효준은, 승연이 잘나가다가 어느 순간, 자기 멋대로 결정하고 효준의 의사는 번번이 무시하는 것을 지금까지는 잘 견뎌왔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안 하리라고 벼르고 있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자 제대로 못 다루면 평생 종으로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얼마 전 사우나에 같이 가서 때를 밀면서 효준에게 그 말을 했다. 느 엄마도 고분고분한 줄 같지? 사실은 이 아빠도 겉으로나 큰소리 뻥뻥이었지, 실은 장관 비서로 산 거나 마찬가지다. 네 엄마 의견에 따라 집안이 굴러갔지 아빠는 바지사장이나 다른 게 없었다고. 터지기 일보직전의 물풍선 같은 배 아래로 찌그러져 출 늘어진 아빠의 음경이 아빠의 처지와 같다고나 할까. 그 말을 들어서 더 그랬을까.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승연을, 이쯤에서 어떻게 제대로 잡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러는 걸 승연은 알까. 승연은 지난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서울로 오는 횟수를 대폭 줄였다. 효준에게 이제부턴 오빠도 태백으로 와, 왜 나만 주말마다 오가면서 고생을 해야 하는 건데. 장거리연앤데 오빠도 반은 담당해야 하는 거 아니야? 희생이라는 단어까지 쓴 승연에게 또 정이 떨어지려고 했다. 데이트비용을 거의 다 낸 게 누군데, 지는 내봐야 3분의 1이나 될까? 효준은 그걸 계산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했고 빈정이 상했다. 그 먼 데까지 나보고 가라고, 이 말이 막 튀어나오려 하다가 갑자기 이성적이 돼서 그 말은 안 했다. 그동안 승연이 먼 길을 오가느라 고생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나오던 말을 속으로 다시 밀어 넣어야 했다. 그제야 그동안 아무 말 않고 움직여 준 승연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연도 직접 운전을 하고 서울로 올 때도 있었지만, 기차 타고 버스 타고 해서 서울에 올 때가 더 많았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승연이 그동안 고생 좀 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쳐, 승연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보려고 애썼던 자신이 머쓱해 웃고 말았다. 


아침 시간이어서 그런지 황지 공원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황지가 생겨나게 된 전설을 읽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기억이 났다. 아, 맞다. 효준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용소와 며느리 바위> 가 기억났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내용이 바로 기억난 것도 신기했다. 시험을 보기 위해 금기 모티프를 외웠던 기억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롯의 아내가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땅을 바라보다가 소금기둥이 됐다는 얘기. 국어선생님은 아주 유창한 성경지식을 동원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가. 그때 노아의 홍수 얘기도 들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창세 설화에 대해서도 배웠다.  

효준은, 바위가 된 며느리를 기억하면서 어떤 일에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쪽으로 인생의 철학을 세웠다. 취업 시험에 번번이 낙방을 할 때도, 그동안 갈린 여자 친구들과의 복잡한 문제에 있어서도 미련일랑은 냉혹하리만큼 던져버리려고 애썼다. 효준의 철학이 그랬던 반면 승연의 철학은 좀 달랐다. 승연은 어떤 일이든 철저히 분석하고 해석하고 통찰을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승연은 어떤 하나를 이야기하더라도 과거사를 조목조목 들추어 연결시키길 좋아했다. 승연을 보면 어떻게 이야기가 동서남북으로 다 연결이 되고, 원인과 결과가 그렇게 잘 이어지는지 신기했다. 승연이 국사와 세계사, 가족사, 개인사를 두루두루 연결을 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낼 때, 효준은 승연이 점점 무서워지는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효준이 승연을 좋아하다가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를 대라면 그걸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중학교 교사들의 일반적 경향일까 아니면 승연 개인만의 독특한 성격일까. 효준은 승연의 말에 꼼짝도 못하고 번번이 백기를 드는 자신이 옳은 건지 아닌지 고민을 하다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못 속을 들여다보았다. 부잣집을 삼킨 저 못 아래는 어떤 모양새일까, 지하 몇 천 km 깊이일까. 황부자네가 땅으로 꺼질 때 전화가 있었다면, 소방서로 긴급구조요청을 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소방서에서 출동을 해서 그 집을 구해낼 수는 있었을까? 며느리는 안심을 하고 친정으로 갈 수 있었을까? 효준은 객쩍은 생각을 하다가, 못 하나에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못이든 바위든, 산이든 꼭 이야기를 만들어 붙이는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 구성 능력에 박수를 보냈다. 태백이라는 도시 안에는 황지 전설 말고도 무수한 이야기들이 숨어있을 것 같았다.

효준은 승연이 태백으로 발령을 받고 난 이후 여태까지 쭉 만나오면서 앞으로 승연과 잘 지내야 하는지, 헤어져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승연은 태백에서 자취를 하면서 전화를 걸어와 징징거리는 날이 많았다. 여기서 어떻게 버티냐고,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게 도무지 없다니까. 안 마시던 맥주도 이젠 잘 마시게 됐다고. 오빠. 처음엔 맥주 한 캔이었는데 이젠 세 캔을 마셔야 잠을 좀 잘 수 있어. 그렇게좋아하던 책이 이곳에서는 왜 이렇게 안 읽힐까. 책도 시들하고 블로그 활동도 시들하고 그래. 의욕이 안 생기는 게 문제라고. 효준에겐, 마치 옛날에 아버지 붙잡고 시집살이를 하소연하던 막내고모 같았다. 산 넘어 산이라고, 임용고시만 합격하면 다 된 줄 알았는데, 어떻게 태백으로 발령을 내릴 수 있냐 말이야, 로 시작한 하소연과 푸념은 매일 반복재생이 됐다. 어쩌면 그 문장들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지도 몰랐다. 잘 들어주다가 임계점에 도달하면, 효준도, 태백이 그렇게 싫어? 하고 물었다. 그건 순응하고 잘 살아보라는 얘기였는데, 승연은, 일곱 살 난 계집애처럼, 정말 싫어, 싫어도 너무 싫어, 하고 대답했다.

저 징징대는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전화만 오면 효준은 가슴이 철렁했다. 

전화로 주절주절 늘어놓은 ‘태백살이’의 고단함은, 주말에 만나면 또 들어줘야 했다. 

통화 때는 얼굴을 안 봐서 괜찮았는데, 막상 얼굴을 대하고 보면 더 짜증이 치밀었다. 급기야는 야, 너 같은 애가 무슨 학생들을 가르치냐, 하는 말이 나올 뻔한 적도 있었다. 공무원 수준하고는, 이런 말도 내뱉을 뻔했다. 그러나 그 말은 안 했다기보다는 못 한 게 맞았다. 승연의 기분을 생각해 겨우 진정을 하고 한 말이 태백이 참 나쁘네, 우리 승연이를 이렇게 힘들게 하니, 였다. 닭살이 돋았지만 덤터기를 안 쓰려면 그게 수였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 승연에게, 급기야, 그럼 아예 거기서 나오든가, 하고 말을 해버렸다. 효준이 그렇게 말하자 승연은 그 말을 붙잡고 늘어졌다. 남자들이란, 아니 오빠란 사람은 참 인내심도 바닥이다, 하고 내가 답을 몰라서 그래?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있다고. 자기가 징징거린 건 생각 못하고 그 징징거림을 못 들어준 효준을 타박하니 어이가 없었다. 이젠 적응을 좀 해봐라. 남자들은 군대도 갔다 온다. 한 달 두 달인 줄 알아? 2년 안팎 군대서 썩는 남자들 생각하고 좀 참아봐라. 그 정도도 못 견디냐. 효준은 인내심이 폭발해 그렇게 쏴붙였다. 

지금 왜 군대 얘기가 나오는 건데. 맥락이 다르잖아? 나 어렵게 붙은 임용고시야. 학교 안 나가면 오빠가 나 먹여 살릴 수 있어? 오빠네 집 잘살아? 내가 엄살을 부려서가 아니야. 태백 무시해서가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료하게 보낼 수밖에 없어서 그런 거라고. 임용고사 보느라 진을 다 뺐는데, 도무지 이 동네에서 뭘 할 수 있을지, 감이 전혀 안 오고 매일 집, 학교, 집, 학교 이것밖에 못해 답답해서 그러는 거라고. 뭘 배우려도 배울 게 없어, 친구들을 만나려 해도 다 멀리 떨어져 있고, 오빠만 옆에 있어도 나 이러지 않아. 다른 선생님들도 내 또래는 없고, 다 엄마뻘 아빠뻘이야. 그분들도 제각각 삶이 있으니 나 같은 신출내기한테 관심 기울일 여력이 없다고. 날씨나 좋냐고. 그렇지도 않아. 적어도 내가 적응하려면 일이년 있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 까마득하다고. 오빠가 답을 내려줘도 지금은 어떤 것도 답이 아니야. 내가 적응할 때까지만 받아주면 안 돼? 효준은, 그때 승연이 서른 살짜리 여자가 아니라 열다섯 여중생 같았다. 쉬지 않고 몰아붙여가는 승연의 말에 정이 더 떨어져, 이제 곧 헤어져야지,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다. 원주나 강릉으로만 갔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아, 하고 또 승연이 ‘탈태백’을 부르짖을 때 효준은 ‘탈승연’을 답으로 정한 게 사실이었다.    

승연의 태도가 급격하게 달라진 건 지난가을이었다. 소방서 화단의 봉숭아 이파리가 허옇게 얼룩이 지던 무렵이었으니까. 신고를 받고 출동해 로드킬 당한 어미고양이 사체를 치우고, 주민 제보로 빌라와 주택 사이 오래된 싱크대 안에 들어있던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 다섯 마리를 구조해서 동물보호센터에 갖다 맡기고 온 저녁이었다. 그날, 승연은 비교할 수 없이 맑고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나 태백산 올라갔다 왔다. 몸이 가뿐해지고 술도 안 마시고 싶어졌어. 그래서 내친 김에 짬 날 때마다 태백에 있는 웬만큼 큰 산들을 다 넘어볼라고. 그리고 산과 골짜기를 다 돌아다녀볼라고. 태백의 설화나 지명 이런 것도 다 살펴볼라고. 여기 있으면서 이곳에 관한 책 하나 쓴다 생각하고 말이지. 몇 년 동안 그렇게 공부하면 내가 죽든가 살든가 둘 중 하나겠지, 뭐. 나 학부 때 국문학 부전공한 거 오빠도 알잖아. 부전공이라고 하지만 아마 전공보다 더 잘했을 걸. 이건 정약전 선생을 모독하는 발언일 수 있는데, 그분이 흑산도에 유배돼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물고기 공부를 하셨댔잖아. 갈 데가 바닷가밖에 없으니까 어부들이 잡아온 고기 구경하고 조개들 구경하면서 말이지. 매일 관찰을 하고 기록을 한 거야. 이제 서울 오가는 게 너무 힘드니까 궁여지책으로 뭘 찾은 거지. 내가 왜 우울한가 봤더니, 인서울 해서 뭔가를 배우거나 보려고 했는데 그게 차단이 돼서 그런 거였어. 그걸 너무 늦게 알아낸 거지. 어차피 동쪽으로 더 멀어 떨어진 것, 체념하고 이제 태백을 열심히 파야 할 것 같아. 오빠를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보러 갈 수도 있을 거야. 나머지 세 번은 오빠가 오든지 안 오든지 알아서 해. 오빠가 오든 안 오든 난 이 동네를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할 테니까. 

효준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차바퀴에 깔려 머리와 몸통 절반이 으깨진 어미 고양이의 사체가 어른거려 참담했다. 직접 사체를 치워서 더했을 것이다. 로드킬당한 고양이며 개의 사체를 한두 번 본 게 아닌데도, 새끼고양이들 숫자 때문에 더 그랬을까.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나왔다. 죽은 고양이의 잔상은 너무 오래갔다. 그 여파로 우울한 상황인데, 승연은 하이소프라노였다. 오빠, 손바닥과 손등이 같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나 여기가 이제 좀 사랑스러워지고 있어, 하고 흥분 상태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효준은 의아했다. 뭔 일이 있었는데? 지극히 사무적으로 응수를 했는데, 승연은 효준의 목소리가 다운돼 있는 것도 눈치를 못 채고 저 좋은 이야기만 늘어놨다. 피하기 싫으면 즐기라메? 이제 그러기로 했어. 나, 히말라야 넘은 여자잖아. 이번 참에 태백에 정을 붙여보기로 했어. 

효준이 알기에 승연은 임용고시에 붙기까지 무려 네 번이나 낙방을 했다. 1차도 합격 못하고 세 번을 연거푸 떨어지고 네 번째는 1차 합격 후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땐 효준하고 사귀기 전이었다. 승연 얘기로, 그녀는 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을 한 뒤로 시청공무원인 친오빠한테 돈을 꾸어서 2개월 동안 네팔 트레킹을 다녀왔다.고 했다. 오빠, 나 그때 히말라야 등반을 할 때 잘못해 절벽에서 떨어지면 여기까지가 내 운명이구나, 생각하고 죽을 각오까지 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정말로 5cm만 더 내딛었으면 중심을 잃고 떨어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 그때 안 죽는 걸 보고 결정했지. 살 수 있구나, 라는. 내가 생각해도 거긴 잘 갔다 온 것 같아. 죽으러 갔는데 살아서 오니까 겁나는 게 없더라고, 이번 시험에는 붙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 더군다나 국사 과목은 티오가 나와야지. 세상에, 그런 경쟁률도 없을 거야. 이미 퇴임을 해야 할 나이인 것 같은데 머리가 많이 센 아저씨도 지원을 했더라니까. 코스모스로 졸업한 스물세 살짜리도 달려들었으니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겠어?

승연이 그렇게 임용고시에 열을 올릴 때 효준도 취업 문턱을 못 넘고 번번이 만신창이가 됐다.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원서란 원서 다 넣었지만 모조리 안 됐다. 글을 잘 못 써서 그런가 하고 비싼 돈 들여 자기소개서 대필까지 맡겼다. 그래도 역시 안 됐다. 이제는 불구덩이에 들어가서 죽겠다는 각오로 소방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단번에 됐다. 신기했다. 합격을 하고 얼마 안 돼 소개팅으로 승연을 만난 거였다. 승연은 합격을 하고도 한 학기를 백수로 지내야 했지만, 효준은 보름 동안 유럽여행을 하고 와서 바로 출근을 했다. 승연은 춘천이 연고지다 보니 춘천과 홍천, 원주 쪽으로 발령을 받았으면 했지만, 태백으로 임지가 결정됐다. 그래도 그때 승연은 낙천적이었다. 이번 참에 춘천을 떠나게 된 것만 해도 어딘데? 승연은, 자신의 관심이 온통 서울에 있을 땐 안 보이던 것들이 서울을 버리니까 보였다고 했지만, 채 한 달도 안 돼 그렇게 징징거리는 소녀로 바뀌었었다. 그런데 일 년 반이나 변화가 없다가 태백산을 올라갔다 오면서 마음이 급격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 마음을 바꾸니까 너무 좋다. 아니, 뭔가 승부근성이 생기는 거 있지? 임용고시에 붙은 내가 이걸 못 하겠어?

효준이 여전히 다섯 마리 고양이의 운명 때문에 착잡해 있을 때. 승연은 태백에 있는 동안 등산을 해서 살을 10kg 이상을 빼겠다고 했다. 스트레스 받아서 맥주를 매일 밤 마셔댔더니 살이 많이 찐 거 있지? 임용고시 공부할 때 찐 살 5Kg에, 태백 와서 찐 살 5Kg. 그거 등산해서 싹 빼려고. 우습게도 승연의 몸에 쌀 10kg이 붙어있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효준은 승연의 몸이 예전보다 많이 불은 걸 같이 자면서 느꼈다. 밤에 승연을 안을 때 이전보다 약간 버거운 느낌이랄까. 예전보다 더 물컹하게 잡히는 살이 조금은 거북할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과거에 워낙 말라있었기 때문에 살이 그만큼 쪘다 해도 뚱뚱한 게 아니라 약간 통통해진 정도로 봐주고 있는 터였다. 승연은 효준을 만나기 전에 비해 10kg이 쪘다고 했지만, 효준이 승연을 만난 건 임용고시에 붙고 난 후니까, 효준에게는 5kg의 살만 피부로 와 닿았다. 오빠, 오빠도 이제 운동해야 해. 소방공무원으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내 말 듣는 게 좋을걸. 진짜 그렇게만 하면 우리 먹는 거 외엔 돈도 안 들어. 몸도 좋아질 거야. 

나 이제 막 등산을 시작했는데도 벌써 몸이 되게 좋아진 거 아나 몰라. 내가 먼저간 데부터 안내를 해주고, 새로 가기도 하고 그러면 될 것 같은데. 오빠, 태백 와서 나랑 등산하면서 운동하고 맑은 공기 마시고 가자. 내가 장담하는데 오빠 기관지 100퍼 낫는다. 오빠 기관지 안 좋잖아. 이참에 좋게 만들어줄게. 효준의 기관지를 좋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등산을 시켜야겠다는 얘기였다. 오빠, 나한테 멋진 프로젝트가 생겼어. 오빠랑 같이 태백에 있는 산 다 넘어보고 샅샅이 돌아다녀 보는 것. 그때 효준은 머리가 하얘졌다. 효준은, 승연과 헤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살짝 고민을 하긴 했지만, 등산이 싫다고 좋아하는 승연을 멀리하는 건 치사한 일이었다.  효준은 산에 오르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집에서 뒹구는 것, 롤 게임을 하는 것, 블로그에 떠도는 요리 레시피 따라 음식 몇 가지 만들어서 SNS에 올려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취미랄 게 없었다. 등산과 낚시는, 그의 아버지나 삼촌이 좋아하는 거였고, 그는 실내에 머무는 걸 더 좋아했다. 등산은 피치 못할 상황 아니면 안 하고 싶은 것들 목록 중 상위에 해당하는 취미였다. 그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올라가본 산이라고는 망우산과 아차산 정도? 그것도 다 일과 관련해서였지 개인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혼자 산에 올라갔다가 벼랑에서 굴러 골절상을 입은 등산객을 구하기 위해 대원들과 함께 악으로 깡으로 올라가거나, 산책 갔다가 잃어버린 개를 찾아달라는 신고를 받고 마지못해 숲으로 흩어져 개를 찾은 것 정도. 그러니까 그럴 때의 산은 어디까지나 등산의 대상이 아닌 사고현장일 뿐이었다. 

효준이 등산 때문에 멍해 있을 때도 승연은 끊임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오빠, 서울에 살면서 그 엄청난 미세먼지를 다 맡는다고 생각해 봐. 매일 유독가스를 맡는데다가 미세먼지까지 마시고. 안 돼. 호흡기 다 망가져. 그 말에 효준은, 기침을 더 많이 하는, 드라마 속 폐결핵 환자를 떠올렸다. 오빠, 지금은 괜찮은지 몰라도 나중엔 안 돼. 어쩌면 지금 오빠 몸 안에 이상한 물질들이 가득 차서 폐가 아주 줄어들었을지도 몰라. 그 얘기를 듣고 효준은, 실제 자신의 폐에 뭔 이상이라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쉬 피로하고 두통이 자주 생기는 것도 안 좋은 공기를 너무 많이 마셔서인가. 내 말이 틀렸어? 내가 여기 좀 살다 보니까, 예전엔 몰랐는데, 태백에 있다가 서울 갔다 오면, 이곳 공기가 얼마나 좋은지 알겠어. 그러니까 오빠도 여기로 오는 횟수를 늘려봐. 어차피 오빠를 위한 일이니까. 진짜, 나 서울엔 한 달에 한 번밖에 안 간다.  

효준은 승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승연이 한 달에 한 번 춘천 부모님 집에 갈 수 있으니까 그땐 춘천에서 만난다 치자. 그럼 적어도 서울과 춘천에서 두 번은 볼 수 있는 거지만, 내가 안 가면? 나머지 두 번은 효준이 태백으로 가야 할 처지였다. 효준은, 승연이 이제 섹스에 심드렁한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됐다. 효준은 매일은 아니더라도 한 달에 네 번, 어쩌다 금요일 밤에도 보게 되는 주엔 승연과 같이 자는 횟수가 조금 더 늘어났다. 그런데 승연이 안 오면 그 횟수가 현격이 줄어드는 거였다. 물론 승연과 섹스하려고 만나는 건 아니었지만, 밥 먹기, 미술관 가기, 영화보기와 함께 늘 만나면 하는 스케줄 중 하나였기에 그게 빠진다면 뭔가 허전할 것 같았다. 비상근무이거나 긴급출동으로 주말에 못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해도 그동안은 주말의 풍경이 다른 연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이제 거기에도 이상이 온 거였다. 승연을 안고 잘 때의 만족감은, 일주일의 온갖 피곤을 다 잊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보다니. 얘는, 나랑 같이 안 자도 괜찮은 건가. 승연이 어쩌면 그걸 빌미로, 자신을 태백으로 오게 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아리스토 파네스의 희곡 <리시스트라떼>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평화를 위해 남성들과 섹스를 거부한 여자들 생각이 났다. 어느 블로그에서 읽다가 그 옛날에 저렇게 단호한 여성들이 있었나, 깜짝 놀랐다. 이렇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다 보니 저자세를 취해야 하는 게 자신이라는 답이 나왔다. 제 풀에 꺾여 한 달도 못 있어 승연이 서울로 올라올 줄 알고 내버려두었는데, 승연은 서울엔 한 달에 딱 한 번만 왔다. 효준은 승연을 만만하게 봤다가 큰 코 다친 게 자신인 줄 알고 백기를 들고, 가을 이후 두 번째 태백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며칠 전 수요일이었다. 승연은 통화 중에, 등산이라면 질색할 오빠도 좋아할 만한 산 하나를 발견했으니까 그리 알고 이번 토요일엔 무조건 와. 우선 워밍업이다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와. 슬리퍼 신고도 갈 수 있는 데니까, 운동화 정도만 준비해갖고 와도 될 거야. 효준은, 10월 말에 왔을 때 태백산 올라갔다 내려와 하루는 알이 배겨 힘들었던 기억이 났다. 피트니스센터에 들러 운동을 시작했는데도 등산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혹시 또 그런 산에 가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승연을 의심하는 마음도 살짝 있었다. 그렇지만 승연이 그런 장난을 안 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태백산 갔다 왔을 때 폐가 청소가 된 기분이 들었으니까 적어도 등산이 해롭지 않다는 걸 알기에 상황에 맡기자는 심산이 됐다. 승연은 그렇게  지난가을부터 등산에 탐닉했다. 효준은 태백산의 정기가 좋은 걸 맛보았기에, 어떤 산일까, 살짝 궁금한 마음으로 승연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효준이 황지공원을 어슬렁거리며, 며칠 전 공기업에 취업하고 소방서를 그만둔 동료처럼 공부를 다시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빠, 하고 승연이 나타났다. 저 가르치는 학생들이 볼 수도 있는데, 저렇게 소리를 크게 지를 수 있다니. 오빠 나름대로 등산복 차림 잘 어울리네, 승연이 아래위를 훑어봤다. 역시 오빠는 네이비가 잘 어울려. 효준이 보기에 승연의 입은 자주색 아웃도어 상하의도 잘 어울려 보였다. 승연은 거리낌 없이 효준을 껴안고 볼에다 키스를 했다. 승연은 상관도 않는데 효준은 남들이 보나 안 보나를 살폈다. 배고프지, 오빠? 오빠 좋아하는 순대국밥 잘하는 데 나 알고 있는데. 지난번에 선생님들하고 한 번 와서 먹었는데 괜찮았어. 

승연은 효준을 데리고 황지공원 맞은편 전통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필리핀에서 온 듯한 이주여성이 서빙을 하고 있는 순대국밥 집은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사람들이 꽤 북적였다. 들어서면서 순대국밥을 둘 시키고 구석자리로 가 앉았다.  

오늘은 날 어떤 산으로 데리고 가 고문을 시킬 생각이야?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승연에게 묻자, 승연은, 고문이라니, 섭섭하다, 건강지킴이한테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완전히 최고의 힐링을 시켜주려고 하는데 말이지. 

오빠가 정말 고문을 원한다면 최근에 알아놓은 험한 산을 안내해 줄 수도 있긴 해. 

효준은 승연의 ‘있긴 해’에서, 승연 특유의 하이소프라노에 성욕이 급하게 치솟았다. 

난 주말마다 이미 많이 고문을 당해봤으니까. 어떻게 데려다 줘 봐? 승연은 그 말을 하고는 한참을 웃었다. 그러고는, 아, 잘됐다. 여기에서 내가 오늘 오빠를 데리고 갈 산에 대한 퀴즈를 내야지. 이걸 알아야 거기 올라가는 게 의미가 있겠지? 퀴즈 나간다. 지지리의 뜻은 무엇일까요? ①지지리 못살다, 라고 말 할 때 쓰는 부사 ②칡에서 나온 섬유질을 꼬아 만든 돗자리의 일종으로, 명사 ③고기를 구울 때 나는 지글지글 소리 혹은 그 고기, 부사 혹은 명사 ④아이들이 아무것이나 만질 때 엄마들이 그걸 제지하기 위해 쓰는 표현으로, 명사 혹은 형용사 ⑤예전 숯을 굽고 난 뒤 숯가마 안에서 할머니들이 몸을 지진 데서 생긴 지명, 명사 

효준은 ①번이라고 답할까 하다가 문제의 의도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②번이라고 답할까 하다 다시 ⑤번을 찍었다. 언젠가 외할머니가 옛날에 장판 없을 때 지직인가 기직인가를 깔았다고 한 걸 들은 것 같아 ②번으로 하려다가, 잠시 후 숯가마에서 몸을 지진다는 얘기도 들은 기억도 나고 해서 ⑤번을 찍었다. 승연은, 그럼 그렇지, 오빠가 이 문제를 맞힐 리가 없지, 하면서 정답은 ⓷번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승연은 지지리가, 옛날에 태백에서 멧돼지를 잡아 구워먹는 방법 혹은 그렇게 구운 돼지고기, 고기 구울 때 나는 지지직 소리를 말하는 표현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이따 가보면 알겠지만, 거기에 돼지골이라는 데가 있어. 얼마나 돼지가 많았으면 돼지골이라고 불렀을까. 사냥꾼들이 멧돼지를 사냥해서 넓적하게 자른 다음, 산비탈에 고래를 놓고 그 위에 지글지글 구워먹은 데서 유래한 골짜기 이름이래, 지지리골은.

그런 건 어떻게 알게 된 건데?

효준이 물었을 때 승연은, 음, 비밀! 이따 거기 가면 얘기를 해주지, 하고 대답했다. 그때 순대국밥이 나왔다. 효준은 자른 순대토막이 대여섯 개, 그리고 돼지 대가리에서 나온 고기가 몇 점 섞인 순대국밥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은 다음 순대와 고기를 앞접시에 놓고 다대기를 풀었다. 새우젓을 듬뿍 넣어 짜고 얼큰한 국물을 마시니까 냄새 때문에 안 좋았던 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승연도 국물에 다대기를 풀고 다져놓은 청양고추를 집어넣고는 먹기 시작했다. 무엇이 승연을 이렇게 기분 좋게 했을까. 효준은, 승연을 슬쩍슬쩍 바라보면서 국물도 안 남기고 바닥에 남은 밥알을 다 건져먹었다.


순대국밥을 다 먹고 나서 효준은 승연의 차를 운전해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소도동 쪽으로 향했다. 주차를 하고 개울을 내려다보며 언덕길을 걸어 함태운탄로에 이르는 그 길에서, 효준은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소도천을 내려다보면서 효준과 승연은 나란히 걷다가 털이 숭숭 빠지고 궁둥짝에 상처가 심한 너구리도 만났고, 한 십 분쯤 더 가서는 치즈고양이 한 마리가 나무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을 보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다. 아직 추위가 심하지 않아 물은 얼지 않았는데, 봄에 해토할 무렵처럼 탁해 보였다. 을씨년스러우면서도 뭔가 정감이 생기는 물이었다. 효준은, 확실히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추울 수 있다고 해서 다운점퍼를 입고 왔는데 땀이 날 것 같아 지퍼를 내렸다. 아침나절 머리를 불편하게 했던 버스의 냄새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기분이었다.

길바닥에는 가랑잎들이 모여 있어 승연이 통통거리면서 그걸 밟으면 바스락 하는 낙엽 특유의 소리가 좋았다. 마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는 몇 안 됐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나무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을 것 같았다. 푹신해. 꼭 러그를 밟는 기분이야. 승연이 소녀처럼 나뭇잎더미를 콩콩 뛰었다. 하여튼 귀여운 애야. 승연을 효준한테 소개해 준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승연의 대학 동기인 친구는, 억세고 귀여운 애라고 승연을 표현하던 게 기억났다. 효준은 불현 듯 빠르게 다가가 승연을 안았다. 효준은, 승연이 그렇게 천진난만해질 때면 안아주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어허, 아침부터 음란하군. 승연은 뒤에서 자신을 안은 효준을 떨어내지 않고 키가 큰 나무들을 올려다보면서, 오빠,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지? 하고 물었다.  

무슨 거짓말?

어, 산이 험하지 않아 슬리퍼 끌고도 갈 수 있을 거라는 거.

음, 가봐야 알 수 있을 듯한데. 아직은 확답을 못 하겠고. 

효준은, 나무 사이로 건너다보이는 함태중학교와 빌라, 주택들을 쭉 바라보았다. 

광산이 폐광된 게 오래전이라지만, 석탄을 캐던 마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그 흔적들이 군데군데서 보였다. 함태탄광이 있던 데라 군데군데 원통형으로 되거나 터널형으로 된 탄광시설이 있었는데 전문가가 옆에서 설명을 해주어야 뭐 하는 용돈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여기에 있는 탄광 이름이 왜 함태탄광인 줄 알아? 그리고 왜 함태중학교인 줄 알아? 함태탄광을 개발한 사장이 함백산과 태백산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거래. 효준은, 승연의 말을 듣다 보니 승연이 태백을 공부하면서 이전보다 아는 게 많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승연이 말했다.

오빠, 나 사실은 지난여름이 끝나갈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잘 버티다가 다른 데로 이동할 생각을 하고 있었어. 다른 지역에 티오가 나나 그걸 쭉 알아보고 있었는데, 내가 그러는 거 선생님들이 눈치 채도 별로 좋을 거 없잖아. 그래서 안 하기로 한 거야. 그런데 오기가 생기더라고. 대충 시간 때우고 있는 건 정말 내 스타일 아니라는. 산이 많으면 그 산엘 다 올라가면 되는데, 왜 산만 많다고 절망했을까. 산이라도 돌아다니자. 이런 마음이 되니까 태백이 한결 편해지더라고.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 내 스타일을 바꾸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거지. 처음엔 여기도 산, 저기도 산. 그저 산밖에 없구나,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그렇지 않아. 멀리서 보면 산만 보이겠지만, 산이 많은 만큼 골짜기가 많은 것이고, 골짜기의 숫자만큼이나 마을 숫자도 많지 않겠어? 마을 숫자가 많으면 살았던 사람들도 많았다는 얘기고, 지금은 다 사라졌겠지만 사람 사는 데는 별의별 얘기가 많잖아. 산은 골짜기의 숫자만큼의 마을의 역사를, 마을 곱하기 사람들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내가 명색이 국사선생인데 그런 걸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어떤 직업윤리 같은 것이 생겨난 거지. 승연은 여러 갈래로 가지가 뻗어서 자란 참나무로 다가가 손바닥으로 껍질을 쓸어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 나무도 그렇다. 얘도 하고 싶은 말이 되게 많아서 가지를 많이 친 걸 거야. 효준은 승연의 비유가 썩 괜찮다 싶었다. 

태백으로 발령받고는 문명의 이기를 못 누리는 줄 알고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 

그런데, 오래 있다 보니까 여기를 어떻게 오지라고 생각했는지 내가 한심하더라고. 

차타면 금방 서울이든 춘천이든 갈 수 있는데 말이야. 내가 관심 없어서 그렇지 정선 카지노도 얼마나 가까운데, 말 나온 김에 우리 언제 한 번 가보자, 오빠. 효준은 그 순간, 카지노에 한 번도 못 가본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편견이란 게 이리 무서워. 마치 서울에서 멀어지면 문명하고 동 떨어지는 줄 알잖아? 문명이라는 건 뭘까? 이렇게 겁부터 내기 때문에 인서울인지 아닌지 따지면서 급 나누기에 연연해 하는 거 아닐까.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가보니까 엄마아빠 사는 춘천에 가는 데 넉넉잡아 세 시간 걸리더라고. 서울로 간다 해도 세 시간 남짓밖에 안 걸려. 옛날에 삼십 리, 사십리 걸어간 시간밖에 안 돼. 그땐 하루 백 리 걸어가는 게 아주 일반적이었대잖아. 한두 번 해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효준은 승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도 읍내에 장을 보러 가기 위해 네다섯 시간, 왕복 열 시간 걷는 것은 일로 치지도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가마솥 하나 사기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장에 가서 그걸 산 다음 지게에 지고 산등성이로 해서 집에 오니 밤이 됐더라는 이야기. 효준의 집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솥 사온 이야기였다.

예전에 여기 살았던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걸었을 텐데, 우리는 취미로 걷고 있어. 걷기가 옛날엔 교통수단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운동이고, 취미가 됐잖아. 승연이 그렇게 말하는 걸 잠잠히 듣기만 하고 효준은 말없이 걸었다. 길 위에 있어서 그랬을까. 승연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긴 했나 싶을 정도로, 처음 승연을 좋아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숲길이 마법을 부린 것 같았다. 

승연은 효준의 손을 잡고 있다가 모르는 나무가 나온다 싶으면 손을 풀고 나무한테로 가는 일이 잦았다. 효준은 나무를 좋아했지만, 산에 올라가는 걸 썩 즐기지 않다 보니 나무를 접할 기회가 흔하지 않았다. 그래도 야외에 놀러가거나 공원에서 쉴 때 나무들의 목에 걸려 있는 팻말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이름을 외우려 애를 썼다. 그래도 이름도 모르고 지나치는 나무가 이름을 알고 반가워하는 나무보다 더 많았다. 승연은 아리송한 나무다 싶으면 네이버로 들어가 열심히 검색을 했다. 물박달나무와 자작나무, 은사시나무와 포플러나무가 헷갈린다고 나무의 등걸을 유심히 살피고, 확인을 하면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했다. 이름을 못 찾는 나무가 있으면 나중에 P 선생님을 찾아갈 거라고 했다. 아마, P 선생님이라면 이 정도는 눈 감고도 알려주실 거야. 추석 지나고 혼자서 금대봉 천상의 화원에 갔다가 그분 얘기를 들었어. 그분은 숲해설가라시는데 야생화에 대해서도 엄청난 지식이 있으시대. 그래서 이 권승연이 수소문해 가서 뵙고 왔다는 거 아니야? 효준은, 승연의 열정이 어디까지 뻗쳐 나갈지 또 겁이 났다. 승연 말로라면 그분은 야생화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함을 못 내밀 거라고 했다. 효준은 잎도 없는 나무 갖고 그게 가능할까, 의심을 품었는데 잎이 없다고 나무 이름을 못 맞추면 전문가가 아닐 것 같았다.

승연은 말을 하면서도 연신 나무의 외관과 등걸, 무늬, 아직 못 떨어지고 남아서 흔들리는 이파리를 찍어댔다. 그렇게 나무가 나오면 나무를 찍고, 그런 것을 안 할 땐 아무 말 없이 손을 붙잡고 걷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승연의 손이 아주 작아보였다. 손이 되게 작았구나. 깍지 낀 손을 더 강하게 으스러지게 쥐자, 승연이 눈을 흘겼다. 지금 응큼한 생각하고 있지? 효준은 예전에 승연을 안고 싶을 때 손을 으스러지게 쥐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승연은 그걸 기억하고 그렇게 말하는 거였다. 지금은 그냥 좋아서. 그냥 네가 이뻐서. 승연은 거짓말, 이미 다 티가 나는데, 오빤 날 못 속여, 으이구, 이 아저씨, 못 쓰겠다, 하고 눈을 흘겼다. 어렸을 때 이모가 이모부한테 그런 말을 한 게 기억났다. 효준은 자신의 속내를 다 들킨 것 같아 무안했지만, 숲에서는 솔직해도 된다는 마음이었다.    

삼십 분쯤 걸었을까. 골짜기가 살짝 넓어지면서 집이 몇 채 보였다. 오두막집처럼 보이는 집도 있고, 누가 봐도 점집처럼 보이는 집도 있었다. 건물 입구 벽에 CCTV 촬영 중이라는 문구도 붙어 있는 게 효준에겐 신기했다. 이 산골짜기까지 CCTV가 들어오다니. 하긴 어디 도에선지, 어느 군에선지는, 산속마다 CCTV를 설치해 무연고자가 산에 들어와서 산채를 채취하는 걸 금하고 있다고 했다. 장작과 나무토막을 많이 쌓아놓은 집을 바라보다가 효준은, 뭔지 정감 있네, 여긴 마을인가 봐, 하고 말을 걸었다. 응, 몇 집 있어, 여긴 마을이라고 봐야지. 승연이 대답했다. 뭔가 따뜻한 느낌이 들지? 지난번에 왔을 땐 오후였는데, 굴뚝에서 올라가는 연기를 보고 안 내려가고 싶었어. 헨젤과 그레텔의 집이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 그때 이 앞에서 오래도록 서 있다가 내려갔어. 저런 집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면서, 왠지 예전에 내가 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데자뷰 같은 거. 저 집이 민박을 허용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물어보고 되면 한 번 들어가서 자고 가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 승연이 그 말을 할 때 늦가을 혹은 초겨울의 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환한 볕이 가득 내려쬐는 그 집의 마당으로, 주인인 듯싶은 사내가 나오는 게 보였다.

아마도 저기가 돼지골이 아닌가 싶어, 하고 승연은 산모롱이에 겹쳐 툭 튀어나온 산을 가리켰다. 소나무나 잣나무 같은 침엽수가 아니라 보통 잡목이라고 부르는 활엽수가 많은 산이었다. 웬 돼지골? 효준이 묻자, 승연은, 내가 아는 게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오른쪽 길로 쭉 가면 활목이라는 데가 나오고, 그 활목이 뒤편으로 골프장이 있거든. 그런데 여기 전체를 지지리골이라고 부른대. 큰지지리골이 있고 작은지지리골이 있대, 그 입구 쪽을 돼지골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아마 여기가 돼지골이 맞는 것 같아. 아까 지지리 퀴즈 기억나지? 효준은 그 말을 듣고서야, 지지리라는 말이 돼지를 구워먹던 방식이라고 했던 게 기억났다. 이걸 아는 게 중요해? 

효준이 묻자, 승연은, 나한텐 중요해, 하고 까칠하게 말했다.

승연은 어떻게 태백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효준은 가을 내내 그게 신기했다. 자신은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승연이 다른 사람보다 별난 건 알았지만, 도시 자체를 무슨 과목처럼 공부하겠다는 얘기를 했을 때 꽤나 충격이었다. 2년 넘게 승연을 봐오면서 효준은 승연이 다른 여자들과는 아주 많이 별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이번엔 상상 이상이었다. 

승연이 열 몇 권짜리 소설을 사나흘 만에 다 읽어내는 것도, 어떤 영화를 열 번씩 반복해 보면서 인물들의 대화를 다 기억하는 것을 볼 때도. 승연은 말로만 들었던 마르셸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두 번 정독했다고 했고, 국내의 대하소설들이나 웬만한 작가들의 책은 다 독파했다고 했다. 그 말에 약간은 공포심마저 생겼다. 부전공으로 국문학을 했으니까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데, 뭔가를 할 때 집요하게 파는 것을 보면 자신한테 전혀 없는 면모라 당황스러웠다. 한동안 징징대던 승연이 열정적 승연으로 급하게 모드 전환을 한 게 반가운 것도 잠깐이었고, 이젠 부담스럽고 공포스러운 승연이었다. 자신이 초창기에 제대로 달래주지 못한 후폭풍이 이런 것인가. 이제는 태백의 산과 골짜기보다 자기가 훨씬 못해진 것 같아 당황스럽기도 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내심 조마조마해졌는데, 숲길에서 본 승연은 자신이 오해하고 부담스러워하던 것보다 훨씬 매력이 있어 보이긴 했다.

돼지골인지 뭔지가 저기에 있고, 여기에 뭐가 있고 이런 건 어떻게 알아냈어? 

처음부터 알았나. 알고 싶어지니까 도움의 손길들이 나타나더구만. 처음엔 태백관광지도 보고, 태백의 산 지도를 보면서 거점이 되는 함백산, 연화산, 대조봉 이런 델 올라갔는데, 몇 주 하니까 끝나더라고. 그래서 뭔가 특징적인 데를 가보려고 인터넷 뒤졌는데 대부분이 비슷해서, 아예 태백문화원을 찾아갔어. 거기 가면 인터넷에 안 올라간 정보가 있을 것 같더라고. 아니나 다를까. 여직원이 『태백시지명지』라는 책을 보여주더라고. 보니까 책이 너무 알찬 거야. 한 권 얻으면 안 되냐고 하니까, 몇 권 남지 않아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 가만있을 내가 아니지. T 중학교 국사 교사라고 이실직고했지. 학생들 지도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달라고 했지. 그제서야 주시더라고. 그걸 가지고 온 날 차례를 보고 색인을 들여다봤지. 그러다가 발견한 게 지지리골이라는 골짜기야. 뭔 이런 이름이 다 있어? 처음에 지지리골이라는 이름을 보고서는, 화전 붙이는 사람이 많았댔으니까 지지리 못 살아서 그렇게 지었나 보구나, 하고 그 이름에 해당되는 페이지로 들어가 골짜기 유래를 알아봤거든. 그런데 그게 아닌 거야. 지지리를 해먹어서 그렇게 붙여졌다고. 너무 재미있지? 나 그날 밤 밤새도록 지명들을 소리 내어서 다 읽어봤잖아.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이름도 많고 특이한 이름도 많은 거야. 그 지명 때문에 다른 지명도 더 찬찬히 보게 됐지. 학교 갔다가 퇴근해서 오면 그 책을 붙잡고 계속 읽었어. 으스스한 이야기가 너무 많은 거야. 장군 화장터 이야기 읽다 꿈에 나올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그런데도 다 읽게 되더라고. 그 책 다 읽고 나서 깨달음이 왔어. 내가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골짜기가 모이고 모인 중심지에 살고 있는 거라는, 태백이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나는 그걸 깨달은 게 얼마나 놀라웠는지 몰라. 이름을 몰랐을 땐, 숱한 골짜기, 숱한 산들이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알고 나니까 더 애정이 생기더라. 학교에서 강의로 배우고 과제로 배울 때, 그리고 임용고사 공부하느라 죽어라 외울 때는 공부가 완전 스트레스였는데, 내가 따로 보고 싶고 알고 싶어서 읽는 것이다 보니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뭔가 힌트가 생기더라고. 그래서 관심 있는 데를 찾아다니기로 한 거지. 그래도 심장이 막 뛰더라고. 나는 시골에 안 살아봐서, 시골에 대한 로망이 살짝 있었거든. 그런데 산은 좀 겁났었어. 그래도 내가 누구야, 히말라야 넘은 여자 아니야. 까짓 거 겁내지 말고 가자. 우선 몇 군데 정했어. 지지리골, 구부시령, 너뱅이골, 보쿠골, 유다래미골 이런 데였어. 이름이 뭔가 있어 보여서. 가보니까 시시한 데도 있고, 생각보다 좋은 데도 있고 그런데, 앞으로 쭉 가보려고. 그런 델 갔다 오면서 느낀 건데, 나는 하루 종일 갔다 오는 것도 힘든데, 수십 년 동안 모든 산과 골짜기를 다 찾아다니신 분이 계시다는 것, 그제야 책을 쓰신 K 선생님이 대단해 보이더라고. 그분 앞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어. 내가 요즘에 뵌 분 중 가장 임팩트 있어. 어떻게 수십 년 동안 한 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알기 위해 그렇게 몰두를 하실 수 있을까? 일본 스타일이신 것 같아. 그분이야말로 요즘 우리들 말로 제대로 된 ‘덕질’을 하신 거지. 그분은 방위에 맞게 각 골짜기를 파악한 뒤 친히 글씨를 써서 골짜기며 산등성이며 하다못해 바위이름까지 다 조사를 해놓으셨더라고. 또 중요한 지형지물도 다 표시를 해 놓으셨어. 이분이 아니었으면 아마 산들의, 골짜기들의 이름을 우리는 영원히 모르고 지나치지 않았을까. 알려고 해도 알고 계신 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영원히 모르게 될 뻔했을 수도 있었어. 태백에 사는 사람들은 그분한테 빚을 크게 지고 있는 것 같아. 우리 같은 문외한들이야 어딜 간다 해도 이건 산, 이건 골짜기, 이것 시내, 이건 도랑, 이러고 지나가겠지. 이름을 모르면 기억이 안 나더라고. 이렇게 돼지골이니 지지리골이니 하고 이름을 조사해 정리해 놓으셨으니까, 나도 호기심이 생기게 됐잖아. 그러고 보면 호기심이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어.

겁 안 났냐고? 솔직히 겁나긴 했어. 산에 갔다가 길 잃어버릴까봐. 그리고 산에서 

이상한 남자들 만날까봐. 남자들은 그런 겁 안 내도 되지만, 여자들은 늘 성범죄의표적이 될 수 있으니까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다고. 태백산 같은 덴 워낙 사람이 많으니까 일행 없이 혼자 가도 으스스한 느낌이 안 드는데, 지지리골이라는 덴 일반인들이 쉽게 오는 데는 아니잖아. 나 히말라야 넘은 여자야, 이렇게 생각하고 지난번에 답사 차원으로 왔다는 거 아니야. 호신용으로 잭나이프도 호신용스프레이도 넣고서 말이지. 한편으로는 어떤 남자도, 이런 산에 등산 올 정도의 사람이라면 나쁜 짓은 안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강한 척 해도 산에 오면 정말 약자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 누가 죽여서 버려도 아무도 모른다는. 그 숱한 산 속에 CCTV가 있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지난번에 겁을 좀 먹고 와봤는데 아주 좋았어. 오빠가 같이 오면 너무 좋겠어서 여기로 오자고 한 거고.

효준은 돼지골이라는 지명을 듣다 보니, 예전에 할아버지 성묘를 하러 갔다 본 돼지가 파헤쳐놓은 둥글레가 기억났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묻힌 곳은 선산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쭉 내려오던 중턱쯤이었는데, 거기는 양지바른 데였다. 무덤치고 양지바르지 않은 곳은 없었지만 말이다. 추석 전후해서 무덤가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대경실색했다. 봉분과 무덤 주위 전체가 막 파 뒤집혀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무덤이 다 파헤쳐져 있는 줄 알고,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나중에야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고 표면만 파놓은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둥글레 때문이라고 했다. 돼지는 칡과 둥글레를 좋아하는데, 무덤가가 양지발라 둥글레가 잘 자라니까, 그걸 캐먹으려고 주둥이를 땅에 박고 이르집어 놓은 거였다. 얼핏 보기에 무덤이 다 파헤쳐진 것 같았는데 다행히 거죽만 슬쩍 파놓은 거였다. 그날 효준과 사촌동생 응준, 그리고 아버지와 삼촌 네 남자가, 친척집에 가서 호미와 괭이 여러 개를 갖고 가서 무덤가에 자라는 둥글레를 다 캐왔다. 둥글레를 자루 하나가 차게 캐다 친척집에 반 넘게 덜어주고 가지고 와서 둥글레 차를 해먹었던 기억이 났다. 

오빠, 내가 아끼고 안 한 얘긴데, 나 지난주 토요일에 그분 직접 뵈었다. 책만 읽고 얌전히 있으려고 하다가 이 천하의 권승연이 얌전히 있을 수가 있겠어? 그래서 또 용기를 내서 찾아가 뵙기로 했지. 이곳에 왔다 가니까 지지리가 뭔지 제대로 알고 싶어졌어. 그게 도대체 뭔가 직접 얘기를 들어봐야겠더라고. 태백문화원에 연락해서 그분 연락처 알아냈고, 정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락을 드렸어. 혹시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 있잖아. 그런데, 태백시에 관한 거라면 얼마든지 알려주신다고 해서, 학생 둘 하고 찾아뵀다. 혼자 가기는 뭣하더라고. 지역에 관심 있는 애들 손 들으라 해서 뽑아서 가니까 얘들이 딴짓 안 하고 얘기를 잘 듣더라고. 그날 그분은 관심 있게 연구하시는 것들도 이야기해주셨어. 도시의 이름이 다 한자인데 수도 서울만 우리말로 된 이름을 갖고 있는 이야기며, 정말 많은 얘길 그분한테 들었지. 듣는 내내 긴장이 돼서 혼났어. 서너 시간 말씀을 해주셨는데, 하나도 안 지루했어. 정말 박학다식하셨으니까. 그분은 헤어질 때 나중에 궁금한 것 있으면 전화하라고 하셨어. 앞으로도 뵐 수 있고 전화도 드릴 수 있어.

오빠, 그날 내가 설명을 잘 못 알아듣자 그 선생님이 내 노트를 끌어당겨서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설명을 해주셨다. 나는 대강 이해는 했는데, 오빠한테 설명을 잘해 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잘 상상해서 들어. 그날 그분이 중점적으로 해주신 지지리 얘기는 이런 거야.  옛날에 멧돼지를 잡는 건 목숨을 담보로 한 일이었대. 요즘엔 도심에 멧돼지가 나타나면 총 한 방이면 잡잖아. 그런데 옛날엔 총이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돼지 사냥을 한 거지. 그래도 멧돼지가 좀 힘이 세? 옛날엔 돼지가 공격을 해올 때 피하지 못하면 받혀서 죽을 수도 있었대. 그 선생님 말씀으로는 돼지 잡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대. 우선은 돼지를 좁은 길목으로 몰아서 창으로 잡는 방법이야. 한쪽에서는 돼지를 몰고 한쪽에서는 돼지 지나가는 길목을 지킨대. 그러다가 돼지가 나타나면 창으로 목을 겨누어 찌른대, 아, 소름끼쳐. 그렇게 맨 앞사람이 돼지 면전에서 창으로 찌르면 두 번째, 세 번째 또 창으로 연속으로 돼지의 등을 찌른대. 이렇게 잡는 방법도 있고, 또다른 방법은 사방에서 여러 사람이 돼지를 평평한 데로 몰고 가서 잡는 거래. 궁지에 몰린 돼지가 공격하기 전에 사방에서 창으로 찔러 잡는대. 이렇게 돼지를 잡으면 가장 공이 큰 초번한테, 돼지대가리를 잘라줬대. 돼지대가리에 살이 많잖아. 순대국밥 먹으러 가도 돼지 머릿고기 있는 거 보면, 돼지대가리에 살이 많긴 한가 봐. 그다음은 벼락틀을 이용한대. 나무를 뗏목처럼 사각형으로 틀을 맞춰 묶어 엮은 판 위에다가 돌들을 가득 실어 멧돼지가 지나다닐 만한 데다 걸어둔다는 거야, 그걸 나무에 살짝 붙들어 매놓거나 아니면 바위 같은 데다 걸쳐두거나. 그러다가 돼지가 그 밑으로 지나가면 끈을 잡아당긴대. 그러면 그 틀이 떨어지는 거야. 돼지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겠지. 그래서 그 이름이 벼락틀이래. 나 그때 진지하게 얘기를 듣다가 그 벼락틀이라는 말이 북한 사람들 조어 방법처럼 들려서 큰소리로 웃었다니까. 어찌나 학생들 보기 민망하던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나는 왜 이런 게 재미있을까? 

이렇게 돼지를 잡은 날, 사냥꾼들은 고기를 가지고 마을로도 들어가기 전에 아예 그 자리에서 돼지를 구워먹고 갈 때도 있대. K 선생님 말씀으로는, 우선 산자락에 경사지게 고랑을 판대. 30cm 가량 되는 넓적한 돌들을 구해다가 그 고랑을 덮으면 고래가 만들어지는 거지. 불을 때고 고래 위에다가 손바닥만하게 잘라낸 고기를 척척 얹어서 구워먹었대. 구들 형식이라고 해서 고구려의 구들와 조선시대 구들 이미지를 검색해 봤지. 한반도에만 있는 난방 형식이라며, 구들과 고래가. 그림을 보고 설명을 보니까 좀 이해가 되더라고. 내 친구 할머니네 집에 어느 겨울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 집 아궁이와 방바닥을 떠올리니까 쉽게 이해가 됐어. 못 살던 시절, 고기 먹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인 시절,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던 멧돼지,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이었던 그 멧돼지를 잡기 위해 사내들이 목숨을 건 얘기야. 

효준은, 승연이 지지리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지지리라는 것을 해먹는 사람들을 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원시인들이 등장했다. 조선후기나 한국동란 전후의 한국 사람이라기보다는, 박물관에서 봤던 구석기인들.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 살았다는 구석기 시대 사내들이 그려졌다. 승연이 전해준 돼지 잡는 방법이며 산비탈에다 만든 고래 위 돌판 위에서 구워지는 돼지고기를 상상하다 보니 언젠가 할아버지네 가서 봤던 돼지 잡는 장면도 기억났다. 외갓집이 있던 강원도 홍천 새말에서는, 설을 전후로 해서 읍내에서 돼지를 한 마리 사왔다. 힘이 센 아저씨가 오함마라고 부르는 대형망치로 돼지의 머리를 내리치면 돼지가 기절을 했다. 그다음 숫돌에 간 칼을 목에 푹 집어넣어 멱을 따고, 털을 그슬린 칼로 때를 벗겨내고 각을 떴다. 등뼈니 앞다리니 뒷다리니 몫몫이 나눴다. 각을 떠서 원하는 부위대로 마을 사람들이 고기를 나눠 갖고, 돼지를 잡은 집에서는 내장에 시래기를 넣어 국을 끓였다. 그리고 고기 일부를 슬레이트에다 구웠는데, 요즘은 큰일 날 얘기였다. 라듐인가 석면인가가 엄청 나온다고 다들 기함을 할 것이다. 어른들은 슬레이트 골로 기름이 쫙 빠져서 고기가 담백하다면서 고깃점을 끊임없이 집어먹었다. 효준도 그 고기의 맛이 기억났다. 이쪽의 지지리를 한 번도 못 봤으면서 마치 실제로 먹어본 것 같은 착각이 든 것은 어렸을 때 맛 본 그 돼지고기 맛 덕분일 것이다.  

최근 들어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강가의 한때도 기억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삼촌, 고모부 해서 여럿이 강가에 놀러 가면 어른들이 아궁이 모양으로 돌을 쌓고 어디서 넓적한 돌판을 구해와 그 위에 얹었다. 그럴 때 엄마를 비롯해 고모, 숙모 들은 홍수로 강가에 떠밀려와 걸린 나뭇가지들을 모아다가 불을 지폈다. 연기가 폴폴 나다가 불길이 제대로 잡혀 화력이 좋아지면 돌판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러면 그 위에 사갖고 간 목삼겹과 삼겹살을 얹었다. 그때 고기가 돌에 닿는 소리가 소나기 소리처럼 들렸다. 경사진 돌판의 가장자리로 기름이 흘러내리면서 고기는 잘 익어갔다. 고기가 익으면 남자 어른들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고, 여자 어른들은 쌈을 싸서 제 새끼 먹이기 바빴다. 지금 효준이 기억해도 프라이팬에 구울 때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 고기가 맛있었다. 그런 날, 남자 어른들이 술추렴을 더 할 때 어머니와 고모, 숙모 여자 어른들은 버드나무가 우거진 쪽으로 가서 다슬기를 주웠고, 효준은 그만그만한 또래의 사촌들과 멱을 감고 놀았다. 그 강가의 풍경이 떠오르면서 뭉클해졌다. 이제 서른을 막 넘었는데, 그때가 아주 오랜 옛날처럼 기억됐다. 돼지고기 굽던 장면을 기억하니 효준의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오후에는 아무래도 돼지고기를 먹어야겠단 생각이었다. 

효준이 그 얘기를 해주자 승연은, 오빠, 우리도 나중에 어디 가서 지지리 해먹자. 

여기 스타일로 구워먹기엔 우리 능력이 안 되니까 못 할 거고, 오빠네 방식으로 말이지. 오빠, 말 나온 김에 이따가 우리 돼지를 먹을래? 아니면 태백 한우를 먹을래? 효준은, 오늘은 돼지 먹고 내일은 한우 먹으면 안 될까, 하고 대답했다. 승연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 알았어,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내일은 오빠가 사. 효준은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이따 산에서 내려가 고기를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참, K 선생님도 그러셨다. 이곳의 광부들도 간조를 보는 날, 왜 노가다 하시는 분들이 간조라는 말 쓰잖아. 광부 아저씨들도 월급이 나오면 가족들이나 동료들 데리고 야외로 나가서 지지리를 해먹었다고. 탄 캐시던 분들은 탄가루 빠져 나가라고 돼지비계를 많이 드셨대. 이 이야기를 듣는데 효준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본 진폐증 환자가 떠올랐다. 포르말린 용액에 담긴 폐는, 인간의 몸에서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참담한 색깔이었다. K 선생님은, 아마도 먼지 쓸려 내려가라고 돼지비계 구워먹는 것의 원조가 이쪽 태백일 거라고 하셨어. 옛날에 나 가르치셨던 남자 선생님들도 분필가루 많이 먹으면 나쁘다고, 분필가루 빼낸답시고 돼지고기 구워먹는다고 한 걸 들은 기억이 나네. 다 연결이 되나봐. 나도 교사니까 돼지고길 먹을 때 그 생각을 하긴 해. 그렇지만 그건 분필을 많이 쓸 때 얘기지. 요즘에야 뭐 판서를 많이 하나. 분필 없어진 지가 언젠데? 보드마커 쓰는 것도 드문 일이 됐다, 요즘은. 나도 뭐 쓰면서 가르치는 건 싫더라. 대부분 수업을 ppt로 하니까 판서는 거의 없는 편이야. 아이들도 필기하는 것 귀찮아 해.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안 되냐고 하는 세상이다. 옛날에 우리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선생님 하면 판서하시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예전에 효준도 목을 많이 쓰는 사람들, 특히 분필가루를 많이 마시는 선생님들은 돼지비계를 먹어야 한다고 한 걸 들은 게 기억났다. 효준은, 돼지고기 먹는다고 먼지가 쓸려 내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디서 본 것도 기억났다. 그 사실을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닐까 고민하다 안 하기로 했다. 광부들 생각을 하느라, 잠시 뭉클해졌던 것도 그 말을 안 하게 된 이유였다. 어디서 봤을까. 광부들이 탄을 캐고 와서 씻던 장면. 군대 있을 때 단체로 샤워를 할 때와 오버랩 되던 그 장면. 검은 탄가루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처럼 된 남자들이 단체로 들어가 샤워를 하는 장면은 어디서 본 거였을까. 그는 광부 하면 바로 연상되는 게 그 장면이었다. 살이 찔 수 없이 노동량이 많았던 청장년 광부들. 그들의 앙상한 몸 위로 쏟아지던 물줄기, 그 물이 머리에서 몸으로 흘러내리면서 탄가루가 씻겨 내려가는 모습에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지난번 석탄박물관에 갔을 때 광부들의 삶을 재현해놓은 곳에서, 효준은 울컥해서 더는 못 보고 자리를 벗어났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탄광촌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걸까. 탄광촌이 먹고 살 만했다는 뜻이 아닐 거라고 효준은 넘겨짚었다. 전망이 불투명한 사람들은, 순간의 기분에 휩싸여 돈을 마구 쓴다고 했다. 갱도가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매일매일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았던 그들이 돈을 쓸 때 일 년 뒤, 이 년 뒤를 계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간의 기분에 맞춰 충동적으로 돈을 쓰다 보니 그런 말도 나돌았을 것이다. 물론 그땐 탄광이 호황이었으니까 탄광촌 경기가 좋았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남들의 방안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매일 탄을 캐지만, 자신들은 서늘하고 깜깜한 곳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 그 불안과 공포 속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었을까. 광부들이 남자라고 해서 그들에게 겁마저 없었을까. 처자식을 놔두고 그 안으로 들어갈 때의 그 막막한 기분을, 효준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서도 마치 자기가 그랬던 것 같은 기시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건 어렸을 때 마루 밑에서 죽을 뻔한 기억과 맞닿아있었다. 

여섯 살 때였나. 시골 외갓집에서 봄여름을 보낼 때였다. 동생을 낳고 엄마가 몸이 안 좋았을 때, 아버지는 그를 이모와 외할머니한테 반 년 정도 맡겼다. 어느 날 주머니가 해지면서 오백 원짜리 동전이 떨어져 마루의 나무 틈 사이로 빠져버렸다. 

대청마루는 길고 넓었지만 바닥에서 높지 않아 개나 아녀석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시간에, 외할머니는 소죽을 끓이느라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각개전투를 하듯 어린 효준은 배를 깔고 조금만 더더 하고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마루 밑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없던 연기였는데, 얼마 후 연기가 부엌 쪽에서 스며들었다. 흙벽 사이 쥐구멍이나 진흙이 갈라진 틈 사이로 들어온 연기는 금방 마루 밑을 가득 채웠다. 동전이 떨어진 위치라고 짐작한 데까지 갔을 때는 연기가 자욱해졌고 매캐한 연기를 맡으니 정신이 혼몽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고 기침이 나왔다. 이젠 동전 같은 게 중요하지가 않았다. 연기 때문에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어렸는데도 죽음이 코앞일 것 같은 위기를 느꼈다. 캑캑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냉이를 다듬고 있던 이모가 그 소리를 듣고 119 구급대원이 돼서 쫓아왔다. 이모는 마루 밑으로 머리를 디밀고 두 손으로 효준의 두 다리를 끌어당겼다. 

거길 왜 들어가? 니가 개야? 효준은 그때 처음으로 이모한테 엉덩이를 마구 두들겨 맞았다. 그때 이모가 없었다면 질식을 해 죽었을지도 몰랐다. 효준은, 그때의 기억 때문에 불을 싫어하고 연기를 싫어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소방대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게 신기했다. 중학생 때였나, 초등학생 때였나. 탄광매몰사고로 광부들이 지하에 갇혔다는 뉴스를 볼 때, 그는 마루 밑의 자욱한 연기를 기억하고 몸서리를 쳤다. 군에 입대하고 나서 화생방 훈련을 받을 때도 마루 밑이 떠올랐다.

오빠, 우리 지금 하는 일이 너무 힘들면 나중에 그만두고, 태백에다 지지리집 하나 차리자. 잘될 것 같지 않아? 그때까지 열심히 일해서 돈 모아두었다가 한번 장사 해보는 거지. 우리 둘이 하면 잘될 것 같지 않아? 아무래도 이 고깃집은, 일반 건물보다는, 오래된 한옥 같은 걸 개조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산 밑에다가. 그래야 고래를 놓고 지지리를 굽지. 승연은 헨젤과 그레텔의 집이라고 이름 붙인 그 산 밑의 집을 보면서, 저 집도 지지리집으로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말했다. 효준은, 요즘이 어떤 상황인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장사를 한다고? 농담으로도 그런 말 하지 말자, 하고 말을 잘랐다. 효준은, 자영업으로 이 장사 저 장사 다 해보고 나중에 식당을 하다가 망해 버린 이모네가 기억났다. 승연은, 뭔가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맞아, 내가 너무 쉽게 말해버렸네. 난, 그 아이템이 너무 좋아서 그걸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말이지 아무나 장사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었어. 태백에 지지리집 하나는 있어야 정체성이 살 것 같아서 한 말이지. 그건 그렇고, 오빠, 나중에 나랑 같이 K 선생님 찾아뵙고, 재미난 이야기 듣고 오자, 괜찮다시면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하고 승연은 제안을 했다. 폐 끼쳐 드리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는데, 효준은 그렇게 대답하고 더 이상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둘은 그 마을을 벗어나 지지리골로 접어들었다. 승연은 밋밋한 길을 걷는 게 전혀 지루하지 않게 K 선생님의 책에서 읽었다는 거북바우 이야기, 용정의 이 씨 이야기, 장군화장터 이야기, 구렁바우 이야기를 해주었다. 괴기스럽고 비극적인 이야기들이었다. 효준은, 이야기를 해주는 승연이 할머니 같다는 생각도, 천일야화를 전해주는 세헤라자드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구연동화를 들려주듯 승연이 말을 잘 풀어내는 것도 예전에 승연에게서 잘 못 본 부분이었다. 얘가 이런 재주까지 있네, 효준은 오늘의 승연이 여느 때보다 낯설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승연이 해주는 태백의 옛날이야기에 푹 빠져서 걷다 보니 한 시간 반은 족히 걸은 것 같았다. 중간중간 사방댐이 있는 것 외엔 이렇다 할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길이 상당히 편해 걷기엔 제격이었다. 좁지 않고 길이 널찍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숨이 안 차니 여유가 있다. 그 여유 덕분에 이야기도 많이 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이 길 위에선 이야기를 잘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늙은 사람들에게도 무리 없이 좋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효준은, 승연이 아주 험한 산골짝으로 데리고 가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렇게 물었는데, 승연은 활목이까지만 갈 거야, 하고 대답을 했다. 활목이? 왜 활목이래? 효준이 궁금해 하자, 승연은, 아, 산이 활처럼 휘어서 붙여진 이름이래, 하고 답을 해줬다. 물론 나는 산이 도대체 어떻게 휘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이제 조금 더 가면 그 활목이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골프장이 나올 거야. 나 지난번에 왔을 때 골프공을 네 개나 주웠다. 누가 제대로 쳤나 봐. 한편으로는 걷고 있다가 공에 맞을까봐 살짝 걱정은 되더라고. 그런데 아마 골프공에 맞을 확률이 로또 맞을 확률보다 적을걸.

연이 말한 활목이가 얼마 안 남았다고 한 어느 지점이었다. 길바닥만 내려다보며 걷던 효준은 눈앞에 나타난 자작나무 숲에 깜짝 놀랐다. 와, 자작나무숲이다. 여기에도 자작나무 숲이 다 있었네. 다른 나무들이라고 무심하게 본 것은 아니었는데, 뽀얀 몸피 때문에 자작나무 숲이 더 반가웠다. 그동안에 본 나무들은 잎도 별로 안 남고 여러 수종이 섞여 있어 구별이 잘 안 됐는데, 누군가가 작정하고 조림을 한 것 같은 자작나무 숲이었다. 자작나무가 뿜어내는 좋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 심호흡을 했다. 아주 좋은 공기가 기관지를 통해 폐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효준은, 이 지점에서 자작나무를 만난 게 마치 보물찾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얗게 타버린 숫자 1들의 교실, 땅 속에 뿌리를 박은 백색의 굵은 빗줄기들, 육탈이 된 뼈들


효준은 자작나무 숲을 보고 시를 쓰라고 하면 이렇게 쓸 것 같았다. 백색의 나무기둥만이 줄 수 있는 단순성은 사계절 어느 때 봐도 매력이 있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살덩이들이 다 타버리고 바닥에 남은 본질, 인생을 떠받쳐 온 뼈들. 자작나무는 본질, 핵심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자작나무를 볼 때마다 겸손과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이번에도 자작나무는 그에게 그런 의미를 주었다. 

효준은 자작나무를 워낙 좋아해서, 인터넷 카페에 가입을 할 때 거의 대부분의 아이디를 자작나무 88로 썼다. 88년은 효준이 태어난 해이기도 했다. 효준은 자신의 아이디에서 긍지를 느낄 때가 많았다.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가 ‘내나무’로 자작나무를 심어준 것 같았다. 옛날에 자식이 태어나면 아들일 경우엔 소나무, 딸일 경우에 오동나무를 심어준다고 했다. 효준은 인제 자작나무숲에 갔을 때 봤던 자작나무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내나무’로 정해온 지 십년이 돼가고 있었다. 차를 끌고 가다가 산자락이든 산중턱이든 자작나무가 보이면 속도를 줄이고 하얀 나무들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어디를 가도 자작나무숲 앞에서는 위로를 받고 기운을 얻었다.  

승연은 자작나무가 관심이 없는지 그 앞을 지나쳐서 저만치 앞서가더니 키가 작은 나무들을 흔들기도 하고, 어떤 나무의 가지는 꺾어서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저건 무슨 시추에이션? 효준은 날것 그대로인 것 같은 승연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저 애를 길들일 생각을 했다니. 이젠 자신이 승연에게 맞춰주는 게, 승연의 생명력을 존중해 주는 게 이기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나무를 하고, 승연은 나무에 오는 새라고 하면 되나? 그렇게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활목이까지 가는 길은 좀 가팔랐다. 그동안은 경사다운 경사가 없어서 숨이 가쁘진 않았는데, 이전에 비해서 가팔라지면서 조금은 숨이 찼다. 효준은, 여전히 나무 사진을 찍고 있는 승연이, 중학교 때 국어책에서 ‘내나무’를 배웠는지, 배웠다면 그 단원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말 많은 승연이 그걸 기억하면서도 이야기를 안 꺼냈을 리가 없었다. 승연아? 효준이 불렀을 때, 승연이 왜? 하고 뒤돌아봤다. 

혹시 너한테도 내나무 있어? 승연이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효준을 바라보았다. 내나무? 웬 내나무? 잘 모르겠는데, 그게 뭐지? 힌트를 줘봐. 효준이, 중학교 국어, 하고 말을 하자마자 승연은, 아, 그 내나무? 하고 반색을 했다. 맞아, 나  중학교 다닐 때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그 내나무? 나, 그거 정말 까마득히 잊고 살았네. 오빠는 어떻게 그걸 기억해 냈어? 오빠 때도 교과서에 그게 실려있었어? 처음 알았다. 아,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내나무 안 정하고 살아왔는데. 누가 심어주는 거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심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빠, 그때 글 도입부에 나왔던 내나무 노랜가 타령인가 기억 나? 효준은 가물가물하고 기억이 잘 안 나서 고개를 저었다. 시험에 나무 이름이 나올 수 있다고 해서 그 부분을 다 외웠는데도 기억이 잘 안 나니 안타까웠다.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만 퍼뜩 떠올랐다. 잠깐 검색해 볼게. 승연이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더니 잠시 후, 아, 나온다, 나온다, 하면서 좋아했다. 그러고는 나무타령이 나온 부분 전문을 읽어줬다. 

와, 내용이 이랬네, 이랬어. 와, 신기해! 내용 들어봐.

청명한식에 나무 심으러 가자/무슨 나무 심을래/십리절반 오리나무/열의 갑절 스무나무/대낮에도 밤나무/방귀 뀌어 뽕나무/오자마자 가래나무/깔고 앉아 구기자나무/거짓 없어 참나무/그렇다고 치자나무/칼로 베어 피나무/네 편 내편 양편나무/입 맞추어 쪽나무/너하고 나하고 살구나무/이 나무 저 나무 내 밭두렁에 내나무


이거 라임이 장난 아닌데! 효준은 어른이 돼서 다시 들어보니, <나무타령>의 리듬감과 언어유희가 장난 아니었다. 이거 조선판 <쇼미더머니>인데! 승연은 나무타령을 강약을 조절하고 속도를 조절해 리듬감 있게 다시 읽어내려갔다. 효준은 라임에 대해선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국어선생님의 얼굴과 당시 교실의 분위기,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의 얼굴과 눈앞까지 다가오던 주먹들, 이런 게 같이 기억나 몸서리를 쳤다. 당시 효준은 왕따 비슷하게 따돌림을 많이 당하면서 학교 가는 날이 싫을 때가 많았다. 그 우울했던 봄에서 초여름의 언저리에 그 단원을 배웠다. 수업을 듣다말고 잠시 창밖을 내다봤을 때, 은행나무에서 연둣빛의 은행나무 순이 올라오는 게 보인 것도. 그 연두색에 반해 넋을 놓고 있다가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은 것도. 여러분도 어느 날, 자신만의 나무, 내나무를 정해 사랑해 보세요, 하고 말했던 노처녀 국어선생님도 다 기억났다. 따져보면 그 당시 십몇 년 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승연은 춘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효준은 승연이 두 살 아래인데도 마치 아주 5년에서 10년은 나이 차이가 나 교과서도 다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둘이 같은 내용을 배웠다는 게 신기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게 생기니 무척 반가웠다.   

오빠,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나는 ‘입맞추어 쪽나무’, ‘너하고 나하고 살구나무’가 가장 와 닿는다. 우리도 한 번 입 맞추어 볼까? 승연이 껴안고는 기습 키스를 했다. 

효준은 그 짧은 시간, 승연의 행동에 당황했다. 옛날 어르신들, 정말 재치 짱이다. 

어떻게 요렇게 풀어냈냐? 확실히 난 그때 어렸어. 이런 내용에 큰 감흥이 없었던 거 보면. 나무하고 친하게 지낼 환경이 아니어서 그게 마치 SF소설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던 것 같아. 그래서 내가 그 단원을 기억 못한 걸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물가물하던 것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효준은, 승연이 ‘입맞추어 쪽나무’, ‘너하고 나하고 살구나무’를 가장 와닿는다고 한 게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엉겁결에 내뱉은 말일지 몰라도, 효준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 최근 승연의 전화만 받아도 귀찮고 멀리하고 싶었는데, 한나절 만에 이렇게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오빠, 나도 이왕 이렇게 나무타령까지 봤으니까 이곳에서 내나무 정해 볼래. 근데, 오빠! 오빠의 내나무는 어떤 나무야? 효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작나무, 라고 답을 할 뻔했다가 그냥 참았다. 그건 자신만 아는 비밀로 하고, 새로운 걸 하나 또 정해도 될 것 같아서, 없어, 지금부터 같이 찾아보자, 하고 답했다. 지지리골에서의 또다른 ‘내나무’를 하나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지지리골에도 있을 만한 나무들은 다 있었지만, 눈에 확 띄는 나무는 아직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승연의 이야기에 푹 빠져 내나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효준은 이 골짜기에 있는 수없이 많은 나무들 중에서 어떤 나무가 새로운 내나무로 다가올까, 기대가 됐다. 활목이 정상까지 올라가서 골프장을 보고 내려오면서 천천히 찾자. 너무 급하게 찾는 건 나무한테도, 스스로에게도 예의가 없는 짓일 거야. 승연한테는 아직 말을 하지 않았지만, 돼지골에서 지지리골로 갈라지는 경계에서였을까. 뼈만 남았지만 앙상한 나무들이 모여 있는 산의 전반적인 느낌이 푸근하게 다가왔을 때, 효준은 승연과 앞으로 자주 산에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산에 갈 때마다 새로운 산에서, 새로운 골짜기에서 눈에 띄는, 마음에 드는 나무를 골라 내나무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뀔 때 한 번씩 와서 내나무가 잘 있는지 찾아보겠다는 생각도. 

그게 현실적으로 힘들면 1년에 한 번이라도 오겠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활목이에서 내려오면서 다시 자작나무숲을 보았다. 이 나무들을 만나기 위해 오늘 여기 온 거구나. 영화를 보든 소설을 보든 어느 순간 반전이 있게 마련이다. 자작나무 숲이 걷기의  끄트머리 지점에서 나타나준 게 효준에게는 꼭 그 반전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엉겨 붙어 있었던 승연과의 문제에 대해서도, 뭔가 답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함태운탄로로 들어서서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이 산이 뭐가 좋은지 누군가에게 말해보라면 쉽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난생처음 걸어본 지지리골 숲길의 느낌은 그동안 얼마 안 올라가 보긴 했지만, 다른 산들과 비교해도 아주 특별했다. 그건 승연이 함께였기 때문일 것이다. 승연과 몇 시간 걸어오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게 만들었고, 잠자고 있던 기억들을 수면으로 끌어올린 길이니까 천상의 숲길이었다. 또 폐 저 안 깊숙한 곳도 뭔가 깨끗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막혀 있는 게 풀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산에 올라와서 느낀 색다른 맛 중 하나였다. 승연이 주려고 했던 게 이런 거였나, 오늘 태백행이 지니는 의미를 찾은 듯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는 것이라면, 승연의 철학을 따라주는 게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괄량이 승연과 함께라면, 태백을 공부하는 승연이가 옆에서 해설을 해준다면, 앞으로의 숲길 걷기든 산행이든 얼마든지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상을 찍었으니 이제 왔던 길을 복습하듯이 다시 걸어 내려가기만 하면 됐다. 효준은, 어느 순간 딱 마주치게 될지 모르는 또다른 내나무를 만나기 위해 올라올 때보다 더 유심히, 그리고 신중히 길 양옆의 나무들을 살폈다. 과거의 내나무이자 현재의 내나무이기도 한 자작나무도 좋지만, 승연과 함께하는 이 시점에 찾는 내나무는 미래의 ‘내나무’이면서 동시의 우리나무이기도 할 테니까. 


*이 작품에 나오는 지명과 전설, 지지리 관련 내용은 전 태백문화원장인 김강산 선생의 구술과 그분의 저서 『태백시지명지』, 천상의 화원과 관련된 일부 내용은 김부래 선생의 구술에서 도움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또한 소설에 등장하는 K선생님은 김강산 선생님, P 선생님은 김부래 선생님이 모델임을 아울러 밝힙니다. 그 외 나머지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가공된 것임을 밝힙니다. 


손윤권 중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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