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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물관주변 사군다리에 대한 小考
작성자
윤순석
등록일
2012-12-20
조회수
1971
내용
 


사군다리 小考

 태백시청 농정산림과 윤순석

 

    동점동 자연사 박물관 앞 베란다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태백산문수봉에서 뻗어온 산록 ~ 연화산 ~ 말바들뒷산 ... 자락에 싸여있는 복판의 작은 산이 꽃 수술처럼 보인다.

    구문소 절벽으로 물길이 뚫어지지 않았던 아득한 주라기공원 시절에는 황지천이 이 작은 산을 감싸고 한바퀴 돌아 흘렀는데 지금은 구문소 절벽으로 난 물구멍으로 바로 빠져 버리니 하상河床흔적은 모래땅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 곳 일대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자궁속의 태아같다. 중앙의 작은 산은 태아에, 옛 물길은 양수로 비유해 볼 수 있고, 이 전체를 연화산이라는 자궁벽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이 곳 지명을 「사군다리」라 하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해서 사군다리에 대한 ≪태백의 지명유래(태백문화원, 김강산 편저, 1997)≫를 찾아봤다.

(이 책은 태백지명연구의 기념비적 책이다. 인근 자치단체의 지명유래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남다른 정력과 노력없이는 완성되기 힘든 책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옛날에는 황지천의 물이 이곳으로 흘렀던 곳으로 하상河床에 해당되었던 곳이다 ... 모래땅으로 되어있는 곳으로 싸근다리 사군다리 등으로 불리는 사근다리는 한자로는 사근교士近橋 사근교沙近橋라고 표기한다.

 

읽다보니... 글쎄...!? 

사근교沙近橋(모래 가까이 있는 다리)는 이곳이 원래 하천이였으니 이해가 될 듯도 하지만 사근교士近橋(선비와 가까운 다리)는 좀 억지로 갖다 붙인 말 같다. 숲속 나무 만큼이나 많다고 하여 유림儒林이라고 하는데, 그 흔한 선비가 있었다고 지명이 될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또 「~라고 표기한다」고 했는데, 「~라고 하더라」인지 「~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인지 이해가 어려웠다.

 「~라고 하더라」라는 뜻이면 그런 표기례나 출처를, 후자이면 그 이유를 보강판(보강출판) 때마다 추가로 열거해 놨더라면 하는 그런 아쉬움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군다리 주변에는 무덤이 많은데 이 무덤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족보에서 「사근교沙近橋 또는 사근교士近橋 어디에 묘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거나,

「마을촌로들 누구누구등이 옛날사람들 쓰던 표기대로 지금도 이렇게 쓰고 있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수록한 이 책의 집주서集註書가 이어졌더라면, 픽션 Fiction이 아닌가하는 의심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다음 줄을 이어서 읽어봤다.

 

...옛날 이 마을에서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 사개통(사거리)이라 하였고 그러다 보니 각 곳의 사람들이 왕래하며 이곳의 주막에서 싸개통이 곧잘 벌어졌다.

 

그래서 사방으로 통하는 「사개통」이요 싸움이 잘 벌어지는 「싸개판」「싸개질」의 들(드리, 다리)이기에 사개드리 혹은 싸개드리로 부르다가 「드리」가 「다리」로 변하여 싸개드리가 싸근다리 혹은 사근다리로 부르게 되었다. ...

 

    지명만큼 보수적이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것은 드물다. 미국 아리조나주의 지명이 침략자들의 언어인 영어가 아니라 아득히 오래전 아메리카 인디언 조상들의 말이라고 한다.

이 정도로 지명은 선점력이 강하고 생명력이 질기다. 문자역사는 기껏해야 몇 천년에서 오래봐줘도 만년이지만, 지명은 인간이 말로 의미를 소통하던 수만년 전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명은 고음古音과 고어古語를 재구再構(음운연구를 통해 옛음을 추론하여 다시 구성해 낸다는 말)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해당지역의 지명이 최초 생긴 때가 언제인지 어떤 언어를 쓰는 정치세력권이였는지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단어 만드는 법칙(조자법造字法)과 비교하고, 또 역으로 그 시대의 언어를 연구, 보완함으로써 그 시대 역사편린을 조금이라도 복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태백의 지명유래≫의 위와 같은 지명地名가설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곳이 「교통이 발달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사거리였다」는 등의 전제된 설명이 사실이여야 한다.

또 「서라벌」이나 「사비」가「셔블 >서울」이 되는 ㅂ순경음화 과정과 계림鷄林(계림, 신라)이 달구벌로 변하는 변천과정을 밝히듯,

「사개통(四個通, 四開通)」이 「사거리」가 되는 전개과정을 밝히고, 실용사례를 문헌상에서 찾아냄으로써 언어습관상 「사개통」이 「사거리」의 의미로 쓰인 실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했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일단 사통팔달 번화가이기에 사개통이라 불렸고 그래서 사람들이 싸움질도 많았던 곳이라는 ≪태백의 지명유래≫의 내용을 태백을 방문했던 옛 선비들의 글 중 내가 번역하여 발표했던 글들을 통해 확인해 보기로 했다.

 

1644년에 이곳을 다녀간 윤선거의 기록을 보면, .....

 

十五日早發 朝飯于銅店觀穿川。... 午後溯流十渡上于黃池。路甚崎嶇自穿川還。由鐵岩之上妙物之前則路極平夷而爲觀水脈直溯川源。

 

4월15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동점에서 아침을 먹고 뚜르내(천천穿川)을 구경했다. ...

오후에 계곡을 거슬러 올라 열 번이나 냇물을 건너 황지를 향해 올라가다가 길이 너무나 험해 뚜르내(천천穿川)에서 다시 출발하여 철암의 묘물상 앞을 지나니 길이 아주 평탄해졌다. 하천의 물길을 보면서 물길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라고 하여 철암에서 뚜르내(구문소)로 가서 구경하고 구문소에서 장성으로 가다보니 길이 험해서 인마人馬가 다니기 힘들어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숙종조 때 ≪유황지기遊黃池記≫를 쓴 이보(1629~1710)는 경북에서 구문소로 들어오는 여행경로로,

고선촌高鮮村(구마계곡앞) ⇒ 홍제암洪濟庵(숙박) ⇒ 고선리(산행) ⇒ 대현리 월암月巖(달바위봉)아래 현불사 입구마을 ⇒ 민가에 들어 점심 ⇒ 저녁때 구문소 부근에 도착하여 대여섯집 규모의 마을에서 숙박하고 있는데,

육송정쪽으로 들어왔는지, 태백레이싱파크장를 경유하여 사군다리로 들어왔는지가 모호하다. 아무튼 그 후 구문소에서 떠나 황지로 가는 교통상황은 다음과 같다.

 

觀己。欲從山內?川向黃池, 村人云 山內路險氷滑不如平從山外坦道可以易至。遂由蘇野谷 行十餘里 抵鐵巖村

 

구경을 마치고 구문소 안쪽 하천상류로 올라가는 코스로 황지로 갈려고 했는데

동네사람들이 말하길 “산 안쪽 길은 험하고 얼음이 미끄러우니 차라리 산을 넘지 말고 山 바깥쪽 평탄한 길로 가는 것이 훨씬 쉽게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야곡을 지나 십여리를 가서 철암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입재 강재항立齋姜再恒(1689년~1756년)의 ≪황지기≫에서는 1719년도에 법전에서 춘양 ⇒ 천평 ⇒ 소도 ⇒ 황지 ⇒ 백산 ⇒ 철암 ⇒구문소로 왔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

또 능호 이인상凌壺李麟祥(1710년~1760년)이 서기 1736년경에 지은 ≪태백산기≫에서는 춘양각화사 ⇒ 태백산 ⇒ 소도 ⇒ 황지 ⇒ 백산 ⇒ 철암 ⇒구문소 관람 ⇒ 대현 홍제암 ⇒봉화로 갔던 바,

 

行五十里 宿洪濟庵 又行六十里抵奉化 路皆重嶺險絶。

 

50리를 더 가서 홍제암에서 잤다. 또 60리를 가서 봉화에 도착했다. 길은 모두 겹겹의 고개에 험하기 짝이 없었다.

 

라고 하여 구문소에서 대현을 넘는 부분이 너무 간략하여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18세기까지 구문소에서 사방으로 나가는 교통로로 밝혀진 것은

1. 방터골입구 경유 철암행로

2. 대현행로(사군대리-레이스파크장경유. 또는 말바들-육송정 방향)

3. 메밀뜰경유 장성행로(험해서 포기)

 

이렇게 세방향의 길이 있었으나 장성쪽으로는 험로라 잘 다니지 않았다는 것은 앞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사통팔달하는 정황은 현재까지 나타난 문헌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 근세에 동광銅鑛이 개발되어 사람들 왕래가 빈번해지고 사통팔달하게 되었기에 「사거리」라는 뜻의  「사군다리」가 되었다고 한다면, 바로 「사거리」라고 할 것이지, 통용되지 않아서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어려운 고어古語를 써서 「사군다리」라고 하겠는가?

 

 

   「싸개통」은 국어사전에서 「여러명이 둘러싸고 다투고 승강이질 하는 상황」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우리지역 사람들이 일상 언어생활 중에 쓰던 말인지는 의문이지만, 초점은 「싸움」이 아니라 「둘러싼다」는 뜻이 중심인 듯하다.

 

「싸개」는 어떤 물건을 포장하여 「둘러싼다」거나 뒤집어 「씌운다」던가 하는 보자기나 그런 기능을 하는 물건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사군다리」가 「싸개통」에서 변화된 단어라는 입장이라면, 이곳이 자궁속의 「태아」 같은 형상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사군다리 = 사개질하는 들판 = 싸움질하는 들판」이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사군다리 = 둘러싼 드리, 둘러싸인 드리」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사군다리」의 「사군~」을 감싼다는 「싸개」의 의미라고 세긴다면, 「사군다리」는 「둘러싸인 다리」라는 뜻이고, 쉽게 말하면 「감싸둔 다리 = 싸둔 다리」로 이해된다.

 

    여기에 더하여,「~드리」는 「~드리, ~다리」에서 받침으로 발전된 「둔, 달」로 변화된 것으로, 뜻으로는 「山, 산양山陽, 고高」의 의미를 나타내고 음차표기로는「둔屯, 달達」로 표기되는 고구려 말이다.

 

참고로 일본은 「다카たか」라고 변화되고 뜻도 「고高」다. 「드리, 다리」는 또 「토모다찌ともだち 우달友達」라 하여 「다찌だち」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우리는 「드리, 다리, 달」로, 일본은 「다카, 다찌」로 변한 것이다.

 

    우리지역에서 「월둔동굴」이니 「응달, 양달, 빈달」이니 하는 말의 「둔, 달」이 이에 해당된다 생각한다.

 

만약 신라가 점령하고 있던 시대에 처음 생긴 말이였다면 산중의 양달을 말하는「드리, 다리」가 아닌 골짜기에 초점을 둔「무슨무슨 실」이였을 거라고 생각된다.(“닭실酉谷 마을”을 생각해보라)

 

정리하면 「사군다리」를 싸개통의 변화음이란 입장에서 보면「둘러싸인 산」이라는 뜻이고 쉽게 말하면 「감싸둔 산 = 싸둔 산」이다.  따라서 이런 가설은 조선조 각종 한문서적을 번역한 언해본 중, 「싸개>싸근>사근」의 변화과정을 찾아서 활용 예가 있으면 입증되는 것이다.

 

한편, 이 근처에 다리가 4개소 있었기 때문에 「사근교四近橋」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과 비슷한 예가 있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충남부여에 가면 낙화암아래 백마강白馬江이 있다. 또 백마白馬에 대한 전설도 많다. 그러나 이 강 이름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백강白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백강白江」이 「백촌강白村江」이 되고 이것이 또 「백마강白馬江」이라고 변하여 세종실록에 기록된다. 변화과정은 

 

「백白 = 사비」+「촌村 =마알」+「강江 =가람」

사비 가람> 서블 가람 >백마을 강(白村江) >백말강 >백마강白馬江

 

과 같은 변화 즉, 사비가람(백강) >백마을강(백촌강) >백말강 >백마강. 이 되었다. 이런 후에 백마가 살았니 죽었니 어쩌니 하는 전설이 생겨났을 거라는 이야기다.

「사근교四近橋」는 위와 같은 사례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사군다리」가 「싸둔 산」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쟈근다리(小山)가 더 가능성이 있지않나 싶다.

 

 

태백에서는 쟈근다리(小山)가「쟈근 달 ⇒ 샤근 달」로 되거나,

                         또  「쟈근드리(小野>蘇野) ⇒ 素野(흰들) ⇒ 휜두리(曲野)」로 되었고

삼척에서는 쟈근다리(小山)가「소달小達 ⇒ 소달所達」로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글은 좀 더 연구하여 다음 기회에 올리겠다.

 

2012년10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