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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대의 신비를 간직한 구문소 전설 구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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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구문소 용궁전설

옛날 구문소 옆에 엄종한이라는 사람이 노부모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매일 구문소에 나가 그물로 고기를 잡아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어느날 그물을 쳐 놓은 곳에 가보니 그물이 없어져 버렸다.
엄씨는 이리저리 그물을 찾다가 실족하여 그만 물에 빠져버렸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는데 그곳은 구문소 밑에 있는 용궁으로 용왕이 사는 곳이었다. 용궁군사들에게 잡혀 용왕에게 끌려간 엄씨는 용왕에게 문초를 받게 되었다.
"네놈이 엄종한이냐."
"예"
"너는 무엇 때문에 남의 닭을 잡아가느냐?"
"소인이 어찌 용왕님의 닭을 잡아 가겠습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저놈이 발칙하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네놈이 아침 저녁으로 잡아 가는 닭을 아니 잡아갔다니 고얀놈!"
엄종한은 그 동안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용궁의 닭이었음을 간파하고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용왕님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오나 그것은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인에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는데 농토는 적고 식구는 많아 살림이 어려운지라 그만 용왕님의 닭인 줄 모르고 그것을 잡아 부모님을 봉양 하였사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하였다.
그러나 용왕님의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삼일 동안 잘못을 비니 그제야 용왕이 노여움을 풀며 "그래 듣고 보니 그대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로다. 모르고 한 짓이니 차후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하며 주연을 베풀어 위로 하였다.

용궁의 산해진미를 맛보고 융숭한 대접을 받던 엄씨는 집에 두고 온 부모님과 자식 생각이 나서 먹던 떤 한 조각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주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용왕이 흰 강아지 한 마리를 주며 강아지 뒤를 따라 가면 인간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강아지를 따라 물 밖으로 나오니 강아지는 죽어버렸고 구문소 가에는 무당의 굿소리가 어지러이 들려왔다. 그때 무당이 구문소에서 엄씨의 넋을 건지기 위해 닭을 물에 집어 던졌으나 죽지 않기에 살아 있다고 하였다. 그럴 때 물밑에서 엄씨가 살아 나온 것이다. 모여섰던 사람들은 귀신이 나왔다고 흔비백산하였으나 엄씨는 "나요. 엄종한이요. 귀신이 아니요."하였다. 늙으신 어머님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내 아들이라 하였다. 엄씨가 용궁에서 용왕에게 3일 동안 빌며 보낸 시간이 지상에서는 3년이란 세월이 지나간 것이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니 집안에는 웃음꽃이 피었지만 가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엄종한은 용궁에서 가져온 떡이 생각나서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니 떡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는 그대로 굳어 딱딱한 차돌이 되어버린 뒤였다. 엄씨는 그 돌을 무심코 빈 찰독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아침 엄씨의 아내가 쌀독을 열어보니 쌀독에는 쌀이 가득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엄씨의 아내는 쌀을 몇 바가지 퍼내 보았으나 쌀독의 쌀은 줄지 않고 그대로였다. 아무리 쌀을 퍼내도 줄지 않는 찰독은 화수분이 되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엄씨네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 때 한양 조씨에게 시집간 딸이 경북 대현리의 배지미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친정아버님이 용궁 갔다 와서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다. 쌀독 속에 넣어둔 백병석때문에 부자가 된 것을 알게 된 딸은 친정 어머니에게 잠시만 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알면 큰일나니 안된다고 하였다. 하도 며칠만 빌려달라는 딸의 간청에 못 이겨 친정 어머니는 임씨 몰래 백병석을 빌려주고 말았다. 얼마후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이상히 여긴 엄씨가 백병석을 찾았으나 딸이 가져간 뒤였다.

친정어머니가 딸의 집에 가서 백병석을 달라고 하였으나 번번히 가짜 백병석을 내놓았다. 일설에는 조씨가 엄씨집에 처가살이를 하였다고 하며 백병석을 훔쳐 대현리에 살다가 처가집에서 자꾸 백병석을 찾으러오니 안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대현리에 살던 딸이 친정 부모 몰래 백병석이 들어있는 쌀독을 훔쳐 이고 구문소 앞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백병석은 다시 용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쨌든 조씨네는 백병석을 가지고 안동 땅 모시밭으로 이주하여 가서 잘살게 되었고 엄씨네는 몰락하고 말았다.
단기 4318년 7월 태백문화원 이사(理事)로 있는 강원일보 김영훈 기자가 문화원 임원들과 안동군 서후면 저전리로 취재를 가서 조씨네 집안에 보관하고 있는 용궁석(백병석)을 확인하고 신문에 보도하므로써 전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용궁석은 하나가 아니고 조씨 성을 가진 모든 집안에 용궁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처음 용궁석(백병석)을 가지고 있던 엄씨의 사위 조씨에게는 자식이 여렷 있었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는 용궁석때문에 형제들 사이에 싸움이 날 것 같으니 개울가에 나가 동그란 돌을 하나 주워다가 분가하는 아들들에게 용궁석이니 잘 간직하라 하였다. 아들들은 자기에게 준 돌이 진짜 용궁석인줄 알고 소중히 보관하게 되었고 그 사람들이 또 자식에게 그런 식으로 용궁석을 물려주니 지금에 와서는 용궁석이 수십 수백 개가 된 것이다.

엄종한이 용궁을 다녀올 때 횐 강아지를 따라 나왔는데 그 강아지가 물밖에 나오자 죽어버려 구부소 안쪽 둔산이라는 곳에 묻었다고 하는데 삼형제폭포 윗쪽 강 건너라 한다. 엄중란은 메밀뜨리 건너편 등골이란 곳에 묻혔는데 엄씨의 묘를 용궁묘라 하였다. 그러나 근년에 강원탄광에서 석탄을 캐기 위해 등골 지하로 굴진을 하기 때문에 용궁묘 부근의 지반이 내려 앉아버렸다. 강원탄광 측에서 이장공고를 하며 묘를 옮겨갈 것을 요구하여 후손들은 엄씨의 묘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엄씨네는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선산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한 처지라 엄색의 유골을 옮겨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엄씨의 후손들은 조상의 유골 하나 모실 땅 한뙈기 없음을 비관하며 이렇게 우리가 몰락하게 된 책임은 용궁석을 훔쳐간 조씨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동점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 배지미마을에는 장군대좌형의 명당이 있고 백병석(용궁석)을 훔쳐간 엄종한의 사위인 조씨가 그곳에 묻혀있다.
그리고 조씨 무덤 아래로는 조씨의 후손들 무덤이 여럿 있어 매년 안동지방에서 조씨들이 모여와 시사를 지내는 곳이다. 엄씨의 유골을 옮길 곳이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엄씨의 후손들 가운에 과격한 사람이 있어 용궁 할아버지(엄종한을 부르는 말)의 유골을 대현리 배지미마을 조씨네 문중묘 윗쪽에 묻자고 제의했다. 만약 조씨네가 떠들면 용궁 석을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옳게 여겨 엄씨의 후손들은 엄종한의 유골을 조씨네 문중묘가 있는 장군대좌형국의 제일 윗쪽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묘지기의 연락을 받은 조씨들이 몰려와 엄씨의 무덤을 파내려고 했다.

그러나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낼 수는 없는 일이라 조씨네는 안동 법원에 고소를 하여 무덤을 옮겨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때 조씨 문중사람 수십명이 시사를 지내기 위해 왔다가 그 모양을 보고는 대경실색하여 어느놈이 남의 문중묘 위에 겁도 없이 묘를 썼느냐고 소리쳤다. 묘지기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조씨 문중 젊은 사람들이 길길이 뛰며 당장 엄씨네를 찾아 요절을 내겠다고 험악하게 설쳤다. 그때 문중의 나이 많은 노인이 나서서 젊은이들을 달래며 천천히 말하기를 “그냥 놔둬라. 필시 그 사람들이 여기 와 묘를 쓸때에는 비장한 각오와 또한 옛날 일을 생각하여 용궁돌을 찾겠다고 그런 모양이니 망할대로 망한 집안사람 들이니 섣불리 건들지 말아라. 사실 따지고 보면 그분(엄중한)은 우리들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분으로 그분의 따님인 우리네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조상님들 묘 윗쪽에 모시기로 남도 아닌데 어떠냐.” 하며 무마된 사실이 있다. 지금도 엄종한의 무덤은 조씨네 문중묘 윗쪽에 있는데 이 일은 지금부터 30여년 전에 있었던 사실이다.

옛날엔 엄씨의 후손이 안동 땅에 가면 조씨네가 후히 대접하였고 갈 때마다 쌀가마니를 말바리에 실려 보냈다고 한다.